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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 초대석> 대장동 스토리, 석학에게 길을묻다..

김상환 서울대철학과교수 주역 에서 읽는 인문 정신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요즘 두 가지 서바이벌 게임이 온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하나는 넷플릭스에서 방영되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드라마 「오징어 게임」 에 나오는 놀이다. 다른 하나는 한창 열기를 더해가는 대선 주자들 간의 경쟁이다. 특히 성남시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은 여권과 야권 양쪽으로 번져가고 있어 어느 쪽이 살아남을지 모르게 되었다. 긴박한 서스펜스 스토리가 현실 속에서 펼쳐지게 된 셈이다.

 

서바이벌 게임 두 가지

화면 속의 게임과 현실 속의 게임, 그 두 가지 서바이벌 게임은 우리 전통에 고유한 서사 자원의 풍요성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도 일치한다. 「오징어 게임」은 한국의 토속적인 놀이를 활용하여 탄생한 드라마다. 어린 시절 아무 생각 없이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던 게임들이 세계인들이 공감하는 드라마의 소재가 되었다. 우리의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경험과 기억들이 작가의 역량에 따라서는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는 이야기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대장동 사건은 ‘화천대유’나 ‘천화동인’ 같은 『주역』의 용어를 일상의 잡담에서도 통용될 만큼 친근한 일상어로 만들어놓았다. 동아시아 인문학의 뿌리인 이 책은 64개의 괘(卦) 모양을 차례대로 풀이한다. 각각의 괘는 인간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부딪히게 되는 근본 상황을 가리킨다. 그리고 거기에 붙은 풀이말은 각각의 상황에서 6인의 등장인물이 펼치는 드라마를 통하여 삶의 지혜를 가르친다. 이 점에서 이 책은 그 활용 범위를 짐작하기 어려운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보고(寶庫)다.

 

문제는 이런 『주역』의 진가가 옛날식 문장에 가려 빛을 발하지 못한다는 데 있다. 이 책은 단테의 『신곡』이나 발자크의 발자크의 『인간 희극』 같이 다양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는 철학적 깊이와 윤리적 통찰력이 넘친다. 말하자면 『주역』은 우리의 해석 역량에 따라서는 새로운 이야기가 계속 쏟아져 나오는 64개의 드라마 채널이 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이 책의 내용이 현대적인 상상력 속에 용해되었다가 다시 모습을 되찾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대장’, 하늘을 요동치게 할 만한 힘

아마 그런 날이 온다면, 그때는 대중문화의 한류만이 아니라 고급문화의 한류가 세계 곳곳에 흐르는 것을 목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벅찬 시기도 언젠가 올 수 있으리라 희망하면서 이번의 대장동 사건과 연루된 이름을 『주역』으로 돌아가 다시 생각해보자. 특혜 의혹의 중심에 있는 자산 관리 회사의 이름(화천대유와 천화동인)이 이 책에서 왔다는 것쯤은 이제 온 국민이 알게 되었다. 그런데 대장동이라는 동네 이름부터가 그렇다는 점은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대장은 『주역』의 ‘뇌천대장(雷天大壯)’에서 왔다. 뇌천대장은 화천대유나 천화동인 같이 이 책의 64괘 중 하나에 붙는 명칭이다. 괘의 모양(䷡)을 보면, 하늘 위로 우레가 요동치는 중이다. 쇠퇴하던 천지의 기운이 다시 왕성하게 회복되는 모습으로 풀이된다. 쇠잔과 퇴락의 시기가 지나고 활력이 넘치는 상승의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최근 들어 한국 대중문화가 세계에 이름을 떨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가 대장의 시기를 맞이한 듯한 인상을 준다. 오래된 문화적 퇴행기를 지나서 이제 개성과 잠재력을 마구 뿜어내는 시기로 진입한 것이다.

 

그럼 이런 대장의 기운을 타고 상승하는 기회를 얻은 사람은 어떤 태도로 세상에 임해야 하는가? 『주역』이 가르치는 점은 바로 이런 데 있다. 대장은 하늘을 요동치게 할 만한 엄청난 힘을 의미한다. 왕성한 기세를 탄다는 것은 호랑이 등에 올라탄 것과 같이 위험할 수 있다. 커다란 성공 못지않게 커다란 난관에 빠질 수 있다. 대장의 주인공은 생사(生死)가 엇갈리는 길을 지나야 하고, 그런 점에서 일종의 서바이벌 게임에 빠져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대장의 주인공이 게임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무엇인가?

 

‘대장’의 주인공이 게임에서 살아남는 법

『주역』은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유연성이다. 강하기만 한 힘은 다른 힘과 부딪혀 깨지기 쉽다. 다른 힘을 흡수하면서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도 유연성을 발휘해야 하는 것이 대장의 기운이다. 둘째는 원칙과 절차다. 원칙 없이 행사되는 힘은 공포의 대상이 된다. 절차 없이 아무렇게나 터져 나오는 힘은 제어하기 힘든 폭력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주역』은 대장의 주인공에게 “예가 아니면 따르지 말라(非禮弗履)”고 말한다. 원칙과 절차에 어긋난다면 절대 나서지 말라는 것이다.

 

『주역』은 이상의 두 가지 사항을 숫양(염소)을 등장시켜 이야기 형식으로 풀이한다. 즉 숫양이 넘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타리를 들이받는다. 이때 울타리는 잘못된 관행이나 제도를 암시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는 발을 내딛자마자 자빠진다. 어떤 경우는 뿔을 다친다. 어떤 경우는 뿔이 울타리에 끼여 꼼짝달싹 못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는 뿔을 다치지 않은 채 울타리가 터져 새로운 길이 열린다. 왜 서로 다른 숫양이 똑같이 울타리를 들이받는데, 각기 다른 결과를 맞이하는가? 모든 건 유연성을 발휘하는가, 혹은 자기를 제어하며 절차를 따르는가에 달렸다.

 

대장의 주인공이 성공의 길을 가는 마지막 세 번째 조건은 양심에 있다. 원문은 “천지의 심정을 볼 수 있어야 한다(天地之情可見矣)”인데, 요즘의 말로 하면 보편적인 양심을 증언해야 한다는 뜻이다. 아마 이것이 가장 중요한 가르침일 것이다. 강한 힘을 얻은 자가 몰락의 길을 피하고 계속 상승세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실정은 물론 그 정의를 대변하면서 앞으로 나가야 한다. 『주역』의 원문을 살려서 말하면, “대장(大壯)은 대정(大正)이어야 한다.”

 

답은 인문화(人文化)의 길

이상의 세 가지 조건(유연성, 원칙과 절차, 양심과 정의)을 하나로 집약하여 말하면, 그것은 인문화(人文化)가 된다. 인문화한다는 것, 그것은 물질적인 내용이나 에너지에 정신의 형식을 불어넣어 인간의 무늬가 드러나게 한다는 것이다. 인문화되지 않은 힘은 왕성할수록 무질서를 초래하는 괴력, 분쟁을 유발하는 폭력으로 전락하기 쉽다. 대장의 기운처럼 넘치는 잠재력을 인문화하는 것, 바로 여기에 문화의 핵심적 기능과 본질이 있다.

 

요즘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의 중심에 있는 두 회사명(화천대유와 천화동인)에 대한 설명에서도 인문화의 중요성은 다시 강조된다. 화천대유(䷍)는 천하를 움켜쥘 만한 권력이나 재물을 얻는 형상이다. 붉은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서 온 세상을 비추고 있다. 천화동인(䷌)은 그런 부와 권력의 정점에 오르기 위한 예비적 조건이다. 대유(大有)의 조건이 동인(同人)인데, 동인이란 말 그대로 천하의 인재들이 모인다는 뜻이다. 인재들이 모여 서로 다른 능력들을 주고받는 개방적인 조직이 갖추어져야 큰일을 도모할 수 있다.

 

대유의 축복은 사람을 만나고 모으는 데서 시작한다. 그러면 어떻게 모아야 하는가? 『주역』은 이렇게 가르친다. 모인 사람들 사이에는 갈등이 일어나기 마련이므로 대비하고 해소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서로 차이를 존중하고 의사 소통하는 일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만남의 장소를 분별하는 데 있다. 즉 사적인 공간에서 벗어나 문밖이나 교외에서 모이면 탈도 없고 후회도 없다. 그러나 끼리끼리 밀실에서 만나거나 종파를 지어 집안에서 만나면 파당 간 분쟁이 생긴다.

 

인재의 도움에 하늘의 도움 있어야

위대한 모임은 필경 그런 파당 간 분쟁을 이겨낸 연후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위대한 모임이 계속 유지, 성장하면서 그에 걸맞은 성취를 이루기 위해서는 역시 모임의 장소를 제대로 잡아야 한다. 『주역』은 “들에서 만나면 성공한다(同人于野亨)”고 했다. 고대에는 성으로 둘러싸인 중심지를 나라[國], 나라 밖을 교외[郊]라 불렀다. 들[野]은 교외의 밖이다. 들에서 사람을 모은다는 것은 국적을 초월할 정도로 다양한 무리를 골고루 포용할 수 있어야 함을 말한다.

 

이는 온갖 이질적인 사람들을 울타리 없는 유목적인 공간으로 불러들여 하나로 모으는 역량이다. 『주역』은 그런 역량을 “천하의 뜻과 소통하는 능력(能通天下之志)”이라 했다. 그리고 그런 보편적 의사 소통의 능력을 “문명하면서 강건(文明以建)한” 자질에서 온다고 했다. 유연성을 발휘하고 원칙과 절차를 중시하며 양심과 정의를 따르는 강인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인문화의 자질이 갖추어져야 큰일을 도모할 만한 모임, 다시 말해서 대유를 성취할 만한 동인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역』은 화천대유에 대한 풀이에서도 유사한 표현을 적용한다. 그 자질이 “강건하면서 문명(剛健而文明)해야” 주위에 골고루 인재를 모아 세상을 놀라게 할 만큼 큰일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유의 축복은 인재의 도움만으로는 허락되지 않는다. 인재의 도움 이외에 하늘의 도움이 있어야 최고의 권력이나 막대한 부를 누릴 수 있다. 서양에는 자기를 스스로 돕지 않는 자는 하늘이 돕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주역』은 화천대유를 풀이하면서 하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언급한다.

 

문명화된 도덕적 역량이 최종 조건

우리 전통에는 천우신조(天佑神助)라는 말이 있다. 하늘이 받쳐주고 귀신이 돕는다는 뜻이다. 화천대유에 붙은 풀이말에서 천우인조(天祐人助)다. 하늘이 돕고 어진 사람이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주역』은 “하늘이 돕는 이는 하늘의 뜻에 순응하는 자이고, 사람이 돕는 이는 믿음을 주는 자다(天之所助者順也, 人之所助者信也)”라 했다. 믿음을 주는 말과 행동으로 타인의 도움을 받는 것이 동인의 조건이다. 반면 “하늘의 아름다운 명령을 따르는 것(順天休命)”이 대유의 조건이다. 유가 철학의 천명 사상은 여기서 왔다.

 

이상으로 이번 대장동 개발 특혜 의혹과 관련된 『주역』의 세 가지 괘 이름(뇌천대장, 화천대유, 천화동인)과 거기에 붙은 풀이말을 간단히 정리해보았다. 세 가지 이름은 모두 하늘 천(天)이 들어간다는 공통점이 있다. 거기에 붙은 세 가지 풀이말은 모두 인문 정신을 강조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인문 정신의 핵심에는 보편적 양심과 통하는 도덕적 역량에 있음을 보았다. 문명화된 도덕적 역량이 하늘을 등에 업을 수 있는 마지막 조건인 것이다. 요즘 세계 대중문화에 위력을 떨치는 한류에도, 차기 정권을 두고 경쟁하는 대선 주자들에게도 새삼 다시 새겨볼 만한 이야기일 것이다.   

                                                                 글: 열린연단 발췌            

 

                                         

필자 김상환 (서울대 철학과 교수)

                                   

한국연구재단 책임전문위원

고등과학원 초학제독립연구단 연구책임자

한국프랑스철학회 회장

철학과 현실 편집위원

연세대학교 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