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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 초대석> 포풀리즘 이후 정치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소명 의식은 무엇일까?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며칠 전 필자는 커피숍에서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한 고참 기자를 만나, 세간에 돌아가는 정치 얘기를 들으며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얘기를 나누던 중, 그는 내게 불쑥 누군가 대통령이 되기를 원할 때 그가 갖춰야 할 덕목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갑자기 던진 질문에 답하기 전에 그 질문 자체를 내 식으로 바꿔 생각해보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다가오는 대통령 선거를 고려해 어떤 정당의 대통령 후보에 대해 생각하는 것보다, 진보-보수를 뛰어넘어 한국 정치에서 어떤 소명 의식을 갖는 기대할 만한 정치인이라면 그는 지금 무엇을 먼저 생각해봐야 할까 하는 질문이 더 적절한 것으로 느껴졌다. 이 에세이는 그 질문에 대한 나 자신의 대답이다.

 

역사 의식과 함께 국제 관계에 대한 균형적 관점을

첫째, 좋은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역사 의식과 함께하는 국제 관계에 대한 균형적 관점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역사 의식을 제일 먼저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다른 어떤 요소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한국 현대사가 걸어온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경로와 그것이 만들어낸 경험의 구조로 인해 어떤 단순한 하나의 가치나 이념에 몰입해 그에 바탕한 비전을 가지고 그것을 추구한다고 할 때, 정부를 올바른 길로 이끌어가지 못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냉전 하의 분단과 잇따른 전쟁은 한국 역사를 통틀어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갈등과 분열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부정적 유산이다. 사실 전 세계적으로 한국만큼 인종적 동질성을 구현한 단일 민족을 찾아보기는 어려우며, 하나의 언어, 동질적 문화, 종교적 갈등의 부재라는 조건은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 있는 최적의 역사적, 사회 구조적 배경이다. 그러나 전후 한국은 분단 국가의 수립과 한국 전쟁을 겪으며 그 어떤 나라보다도 깊은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안게 되었고, 그로부터 발원하는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불러왔다. 대전의 종결 이후 시작된 냉전이 한반도로 확산되고 그 가운데서 발발한 전쟁은, 한국 현대사가 극과 극을 교차하게 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남북한은 정치 체제와 사회경제적 운영 원리에서 극단적으로 다른 국가로서 서로를 대면하며 냉전 시기 전체를 통해 상호 간 군사적 긴장과 적대 관계를 유지해왔다. 게다가 남북한이 각각 민족주의 이념과 감성을 동원해 데탕트, 평화 공존, 나아가 그 어떤 형태의 정치적, 사회적 연합을 시도한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넘지 못할 장애가 너무나 많다.

 

첫째, 남북한이 공유하는 민족주의 그 자체가, 필자가 늘 말해온 “분열증적 민족주의(schizophrenic nationalism)”로 나타나 공존과 통합을 가로막는다. 하나의 민족 통일 국가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남북한은 민족주의를 공유하지만, 자신이 정당성을 독차지하고자 하기 때문에 상대와의 통일을 허용할 수 없다. 둘째, 수십 배의 사회경제적 발전의 격차를 안은 조건에서 남북한의 통합은 어떤 형태로든 북한의 개방 없이는 가능하지 않으며, 필자의 생각으로 그 통합은 곧 북한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기에 사실상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셋째, 남북한 문제는, 남북한 쌍방이 어떤 형태의 관계 변화를 추구하는 것만으로 해결되기 어렵다. 한반도로 냉전이 확산된 결과, 분단 국가가 만들어졌고, 남북한 양자 간 적대 관계의 특징들이 만들어졌다. 쉽게 말해, 그것은 완벽하게 냉전의 결과물이었다. 물론 오늘의 국제 정치 질서는 더 이상 냉전이 아니다. 이제 사람들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고, 이미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국제 정치 질서를 목도하고 있다. 어떤 학자는 이를 두고 미국과 중국이 경쟁하는 “이중의 위계질서(dual hierarchy)”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좀 더 대립적인 의미를 담아 두 나라가 헤게모니를 향해 각축전을 벌이는 “신냉전”이라는 용어를 쓰기도 한다.

 

이렇듯 한반도를 갈라놓았던 국제 환경이 변했다면, 남북한 간 관계도 변할 수 있어야 한다. 마치 유럽에서의 독일 통일처럼. 그러나 한국은 이런 변화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관계를 변화시킬 가능성이 뚜렷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아니 이러한 국제 정치 질서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관계의 변화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두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 하나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미국과 중국 간 헤게모니 싸움의 딱 그 중심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냉전 시기 미소 두 초강대국의 딱 중간에서 그 최전방에 위치했던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이, 미소 관계가 탈냉전 시기 미중 관계로 변했을 뿐 달라진 것이 없다. 탈냉전 하에서 미국과 중국은, 과거 미국과 소련처럼 어느 나라도 한반도의 분단을 근본적으로 허물어뜨릴 수 있는 힘의 균형의 변화를 모색하려 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북한의 핵무장화이다. 북한 핵 문제는 이란 핵무장보다 더 복잡한 국제 정치의 최대 이슈 가운데 하나이다. 필자는 바로 얼마 전 이 에세이란을 통해 현재의 민주당 문재인 정부가 민족 문제를 접근하는 방식, 특히 북한 핵무장화에 대응하는 대북 정책을 일견 핵무장화를 암묵적으로 인정하더라도 민족 통일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는 점에서 “최대 정의적 접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것은 현실적이지 못하며 따라서 성공하기 어렵고 많은 위험을 불러올 가능성이 크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필자는 “최소 정의적 접근”을 제시한 바 있다. 한국의 민족 문제 해결 내지 대북 정책의 목표를 민족 통일로 설정할 것이 아니라, 남북한 간 평화 공존으로 한정해, 점진적이고 부분적으로 남북한 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현실적이고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탈핵화에 대해서는 보다 강경한 정책이 요구된다. 그리고 새로운 국제 정치 질서에서도 전통적인 한미 관계를 여전히 중심축으로 놓되, 한일 관계의 중요성을 복원하는 접근이 필요하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변화된 국제 정치 질서에 걸맞은 자립적 국가로서 행위할 수 있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베버는 그의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치인이 지녀야 할 세 가지 덕목을 제시한 바 있다. 대의에 헌신하는 열정, 자기 결정과 행위가 가져온 결과를 기꺼이 인정하고 승복하는 책임감, 사태를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능력을 말하는 균형적 현실 감각이 그것이다(막스 베버, 『소명으로서의 정치』, 박상훈 옮김, 최장집 해제, 후마니타스, 2021년 개정판). 여기서 필자는 한국의 민족 문제를 올바로 다룰 수 있는 덕목으로 이 세 가지 가운데서도 특히 마지막 균형적 현실 감각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믿고 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제대로 이해를

둘째,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대로 이해했으면 한다. 촛불 시위 이후 한국 정치에서는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가 크게 달라졌다는 것이다. 촛불 시위는 여러 방면, 여러 차원에서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에 커다란 변화를 불러왔다. 그 가운데는 부정적인 것들도 많다. 대표적으로 과거 청산, 역사 청산을 모토로 하는 개혁주의 열풍이 한국 정치에 불어닥쳤다. 기득 세력을 척결코자 하고, 제도권 정치에 대한 혐오가 확산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이런 분위기는 기존의 모든 제도와 제도의 운영 원리, 그 운영자들인 선출직 정치인들에 대한 비판과 아울러 불신을 고조시켰다.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낸,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충분히 이해할 법하다. 청와대 입법 청원, 민주당 개혁 과정에서 개혁을 주도한 원리로서 “당원 주권” 논리, 일부 지자체에서의 주민발의 요구 등의 직접 민주주의적 실천은 이론 이전에 정치 현실 속에서 이미 널리 확산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필자는 촛불 시위 이후 정치 환경에서 발전한 이와 같은 민주주의 이해 방식을 운동권적 민주주의관이라고 비판적으로 말하기도 했다.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선호와 이해 방식의 확산이 포퓰리즘을 초래하는 배경이 된 것은 당연하다. 그로 인해 대의제 민주주의를 폄하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면서, 그 자리를 직접 민주주의로 대체하는 것이 더 민주주의적이라고 이해하는 경향이 확대됐다. 이로써 시민사회는 총체적으로 정치화되고, 이른바 진보-보수 간 갈등의 강도는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높아졌다. 보수 정권 하에서 축적된 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대의제 민주주의로 향하게 되었고,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 직접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인식을 불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직접 민주주의가 정부 운영과 정치적 실천으로 확대되면서, 선출직 대표의 역할을 뛰어넘어 청와대 지휘 하의 행정적 민주주의와 만나게 됐다는 것은 커다란 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시민사회는 자율성이라는 본질을 상실하고, 국가/정부의 관료 체제와 접맥됨으로써 그 관료적 고리(ring)를 형성하는 결과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직접 민주주의의 문제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한국 정치 현실 차원에서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이론적 차원에서의 문제이다. 먼저 정치 현실 차원의 문제를 보자. 무엇보다 큰 위험은 민주주의의 핵심 기구인 의회 기능이 약화 내지 축소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직접 민주주의는 의회를 우회하거나 대체할 수 있다는 발상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해 민주당 정부 초기 개헌 시도는 그 과정뿐 아니라 제도적으로도 직접 민주주의를 확대하려는, 성공하지 못한 실천이었다. 직접 민주주의를 모든 조직에 확대하려는 목표는, 이를테면 두 명만 모이면 당의 의견이라는 식으로 정부 여당인 민주당의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려는 시도에서도 나타났다. 민주당, 청와대, 지자체에서 시민의 법안 발의나 청원 같이 공적 정치 과정과 관료 기구 운영에서 시민 참여가 크게 확대되는 양상도 나타났다. 그 과정에서 선출된 정치인들을 비하하고 혐오하는 풍조가 뒤따르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적과 아를 구분하며 여론을 창출하는 일이 실제 정치를 지배하게 되는 현상도 분명해졌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이 자유롭게 표출한 의견을 귀담아 듣지 않으며, 적을 배제하고 공격하는 현상이 공론장을 휩쓸게 됐다. 결과는 사회적 공론장의 해체이다. 그러는 동안 공적, 행정적 영역에서 “행정적 민주주의”의 형태와 직접 민주주의가 만나게 되는 현상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행정적 민주주의는 1970년대 초반 권위주의 시대에 사용됐던 말이 아닌가. 실천 속에서 목도하게 되는 직접 민주주의의 양상은, 권위주의 시기 주요 정부 정책으로 주민의 자발적 참여를 독려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농촌 부흥 운동 프로그램인 “새마을 운동”을 연상시킨다. 권위주의 정부의 주민 참여 프로그램과 지금 정부 하에서 적폐 청산과 같은 혁명적 수사를 내걸고 추진되는 정책으로서의 직접 민주주의적 현실과 무엇이 다른지 구분하기 어렵다.

 

필자는 이 문제와 관련해 직접 민주주의가 기반하고 있는 여러 이론적 오해들 가운데 한 가지만 언급하고 싶다. 직접 민주주의론자들이 자기 논리를 펴나가는 데 있어 루소는 가장 중요한 이론적 논거이자 오해의 원천이다. 루소 정치철학의 중심 개념인 천부인권의 평등한 권리를 향유하는 시민 주권자들이 다수 결정의 원리를 통해 결정하는 “일반 의지”(volonté général/ general will)는 주권의 실체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반 의지를 실현한다고 할 때, 주권이란 말은 인민 전체를 의미하는 집합적 명사이지 주권을 결정하는 평등한 권리를 갖는 개인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시민 전체를 구성하는 개개 시민을 주권자(souverain(e)/ sovereign)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얼토당토않다. 주권자는 정치 공동체의 법 제정에서 최종적 권한을 갖는 사람이다. 개인을 주권자라고 한다면, 민주화 이전 시기 유럽의 절대왕정에서 법의 제정자인 왕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민주주의는 현대의 대의제적, 자유주의적, 정치적 민주주의이다. 즉 그것은 고대의, 또는 어떤 미래의 직접 민주주의적이고, 비자유주의적이며, 정치적인 동시에 경제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다. 이로 인해 자주 민주주의라는 말 자체가 혼란의 원천이 된다. 민주주의는 그 말이 “민중/인민의 권력 내지 통치”를 지칭하는 합성어로서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에서 발원했기 때문에 혼란을 가중시키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 말과 현대 민주주의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의 민주주의는 자유주의 철학의 원천인 천부인권의 인간 평등 사상, 영국의 혼합/균형 헌법(balanced/mixed constitution) 원리를 담은 정부 형태,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과 미국의 헌법 혁명이 서로 교호하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또한 이는 제도적으로 선거를 통해 대표를 선출해 그 대표가 인민의 의사를 담아 통치를 전담하며 정부를 운영하는 체제이다. 따라서 현대 민주주의는 보통 선거권의 원리에 따른 1인1표 제도가 확대되는 과정으로 요약 가능하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경제적 민주주의를 배제한 정치적 민주주의로 정의되는 정치 체제이다.

 

이런 정의가 불만스러운 사람들은 그것이 지나치게 절차적인 것에만 한정하고, 민주주의를 통해 사회경제적이고 실체적인 민주화랄까, 사회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진보의 프로젝트를 추구하고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비판 내지 반론을 제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서 혁명적 이상과 프로그램이 민주주의의 정의에 포함되고 그것의 실체적 내용을 구성해야 한다고 보는 최대 정의적 민주주의와, 민주주의는 절차적 최소 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충분하며, 그렇게 봐야 한다고 믿는 최소 정의적 민주주의를 구분할 수 있다. 우라나라의 진보파들은, 경제적 민주주의의 내용을 헌법 개정 때 조문으로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그에 뒤질세라 보수파들도 보수 기득 세력이라는 소리를 듣기 싫은 나머지 진보나 다름없이 그렇게 주장하는 경우를 본다.

 

그러나 세계의 진보적 민주주의이 론을 주도하는 정치학자들은 실체적 민주주의를 담는 조문이 헌법 조문에 포함되는 것에 대해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것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국가에서나 필요한 내용이 아니겠나. 대부분의 정치학자들은 최소 정의적 민주주의 정의를 따른다. 『정의의 이론』의 저자 존 롤스 역시 그의 또 다른 대표작 『정치적 자유주의』에서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주창한다. 그가 자신의 최소 정의적 민주주의론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민주 정치의 실체적 내용으로 기대되는 경제적 민주주의 주장을 이론적으로 펼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할 것이다.

 

한국 제헌 헌법의 두 축 가운데 하나는 전간기 바이마르 헌법으로 표현되는 한스 켈젠의 헌법 이론이다. 그가 칸트의 공화주의적 자유 이론을 통해 헌법 기관으로서의 정당에 관한 이론을 정립하고, 그 정당들의 교차 집권을 통해 사회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는 법 이론을 발전시킨 바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가장 간략히 정의하면, 그것은 선거에 의해 선출된 자에게 통치를 위임하는 대표성(representation)과, 선출된 대표가 공적 영역에서 자신을 선출해준 시민들에게 통치 행위의 결과를 설명하고 책임지는 책임(성)(accountability)이라는 두 요건을 구현하는 정치 체제를 일컫는다. 둘 중 그 어느 하나라도 결여돼 있다면, 그것은 현대판 전제정이거나 위임 민주주의, 포퓰리즘적 권위주의 또는 국민투표식 민주주의일 수는 있어도, 더 이상 우리가 말하는 자유주의적 대의제 민주주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대의제 민주주의가 직접 민주주의나 어떤 포퓰리즘적 또는 혁명적 열정에 의해 압도되거나 제약받는다고 할 때, 그것은 왜 문제가 되는가? 필자의 관점에서 그것이 문제인 이유는 국가 일원주의(monism)를 추동하며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집행부 중심의 정부 형태 내지 통치 구조를 시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대통령 중심의 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적 권위주의를 오가는, 민주주의라 말하기 어려운 민주주의의 퇴행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그것을 민주주의라고 부를 때, 그런 민주주의는 그 정치 체제가 기초를 두고 있는 사회적 기반인 시민사회의 자율성과 그것을 지탱하는 다원주의적 원리와 충돌하면서 그것을 심각하게 약화시킬 것이다.

 

시민사회의 다원주의적 원리와 그것을 구현한 다원적 구조가 약화된다는 것은 정당의 사회적 기반을 약화시키거나 해체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라면 정치 과정과 정책 결정에서 직업 직능 집단의 투입(input) 기능은 현저하게 약화될 것이다. 정당 또한 대의제 민주주의의 중심 행위자임에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의견이 다른 사람을 집단적으로 공격하는 중산층 중심의 정서적 급진주의(emotive radicalism)의 헤게모니를 넘어설 수 없다. 이럴 경우 정당을 통한 정치는 사회적 기반을 상실하고, 실체 없는 것을 대표하는 것으로 전환되면서 정당 정치의 제도적 공간인 의회의 정치적 통로는 협소해지고, 청와대와 집행부에 종속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정당이 의회를 통해 정상적으로 기능할 때만 법안들은 정당들 간의 경쟁뿐 아니라, 상호 협상과 타협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을 때 의회를 통해 제정될 수 있는 법안들은 의회를 거치지 않고도, 많은 경우 청와대 수석보좌관이 주도하는 여러 행정 위계 차원에서의 무슨무슨 시행령, 내각 결정이나 행정 명령에 의해 충분히 대체될 수 있다. 의회를 장으로 하는 정당 간 경쟁은 그동안 그것을 떠받쳐왔던 견제-균형의 원리와 그것을 실행하는 규범들을 존중하지 않게 되었고, 법안 결정은 다수의 힘에 의해 지배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의회 결정 과정은 협상과 타협의 연속에서 만들어지는, 지리한 타협의 누적적 결정 방식, 즉 고전적 의회주의의 결정 방식이라 할 “그럭저럭 헤쳐나가는 결정”(muddling through/ incrementalism)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정당 간 경쟁과 협력 과정으로서의 전통적인 법안 결정 방식은 이제 다수가 힘으로 밀어붙이고, 상대 정당을 정치 과정에서 배제하는 일방주의에 의해 대체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는 동안 시민을 광장으로 끌어내는 동원의 정치와 그것과 병행하는 여론의 정치가 온 사회와 정치를 지배하며 전 사회가 정치화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왜 혁명적 정조와 개혁의 열정이 민주주의와 병립할 수 없는가를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직접 민주주의를 선호하는 진보파들은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그리며, 직접 민주주의가 대의제 민주주의보다 우월하다고 믿는다. 여기에는 대의제 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시민 투표자와 그들이 선거를 통해 위임한 선출된 대표 사이에 존재하는 무책임과 도덕적 해이를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 제거할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 있다. 시민들이 추첨으로 대표를 선출하고 치자와 피치자의 역할을 번갈아 수행하며 직접 통치할 수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현대 민주주의의 문제를 원형적 민주주의(proto-democracy)로 되돌리는 방식을 통해 해결책을 발견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방향 착오이다. 무엇보다 소수의 시민들로 구성되고 지극히 동질적인 작은 공동체에서나 가능한 고대 그리스 사회의 직접 민주주의에서는 시민 투표자와 대표 사이에 존재하는 거대한 관료 행정 체제를 통해 운영되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 관료 체제를 통제하는 문제에 대한 고려 없이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이것은 왜 루소의 이론이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나 스위스의 제네바나 칸톤이 모델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직접 민주주의가 진보파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라면, 그것이 실제로 얼마나 민주적이고 진보적인 결과를 가져오는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미국에서 직접 민주주의를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캘리포니아 주의 사례는 그 문제점이 무엇인가를 잘 보여준다. 대표적인 시민발의 법안들, 예컨대 재산세 제한(Proposition 13), 삼진아웃 제도(Prop 184), 흑인 취업특혜법 폐지(Prop 209) 등 주 의회를 거치지 않고 만들어진 주요 법안들은 지극히 보수적인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법안들은 기업 이익에 기여하며, 언론 광고를 폭넓게 활용할 수 있는 기업 주도로 이루어진 것들이다.

 

아테네 민주주의가 직접 민주주의의 모델이라면, 그것은 노예 생산에 힘입어 많은 여가를 누릴 수 있는 소수의 시민 집단이 운영한 것이었다. 그와 달리 같은 시기 농업 생산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도시 국가 만테니아에서는 생업에 바쁜 농민들이 스스로 공적 역할을 맡을 수 없어 대표를 선출해 통치를 대행시켰다. 거기에서는 직접 민주주의가 아닌 대의제 민주주의를 선호한 것이다. 이 사례는 오늘의 한국 현실에서도 유효하다. 직접 민주주의를 확대하고, 광장으로 정치적 의제를 끌어내면서 온 사회를 정치화할 때, 생업에 바쁜 노동자, 자영업자를 비롯한 생산자 집단이 얼마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을까. 결국 직접 민주주의의 운영자들은 운동의 활동가들이거나 교육받은 도시 중산층일 가능성이 높다.

 

법의 지배를 의무로 여겨야

셋째, 법의 지배를 의무로 여겨야 한다. 법의 지배가 곧 민주주의는 아니지만, 법의 지배 없이 민주주의는 존립할 수 없다. 앞에서 필자는 민주주의가 대표와 책임의 두 축으로 구성된 통치/정치 체제라고 말했다. 이 두 측면 모두 법의 지배 없이는 가능하지 않지만, 특히 책임의 측면에서 법의 지배는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대표와 책임이라는 두 측면으로 구성되어 지극히 간단한 원리를 구현하는 정치 체제로 볼 수도 있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정치철학적, 정치이론적 조건인 자유와 평등이라는 원리에 의거함으로 인해 엄청나게 복잡한 이론 내지 성격을 함축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민주주의는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 이후 강조된) 자유보다는 평등의 원리를 통해 구현됐다. 그러나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에 이르러 자유는 민주주의에서 훨씬 더 중심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어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민주주의가 인민의 권력 내지 인민 스스로의 정부/통치 체제를 의미한다고 할 때, 그리고 그 인민이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천부인권의 권리를 갖는다고 할 때, 그들이 자신의 자유를 실현하는 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바로 인민 스스로의 정부이다.

 

그런데 이렇게 창출된 정부 하에서 누군가 인민의 자유를 억압한다면, 누가 그 자유를 지킬 수 있나. 당연히 그 자유는 정부가 보장해주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정부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 헌법의 역할, 정부를 운영하고 사회를 관장하는 모든 법을 아우르는 근본 규범인 헌법의 존재 이유가 이것이며, 헌법을 수호하는 사법 체계의 역할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의 대의제 민주주의를 곧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것의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국가는 법을 지켜야 할 책임을 지도록 헌법을 통해 강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

 

미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제임스 매디슨은 미국 헌법의 이론서라 할 만한 『페더럴리스트』(연방주의자 논설) 51번에서 정부를 조직하는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을 다스리는 정부를 구성하고 운영함에 있어, 가장 큰 난제는 바로 이 점이다. 즉 먼저 정부는 피치자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다음 정부가 스스로를 통제하도록 강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헌법주의와 민주주의 간의 관계가 갖는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정부 권력을 제한하는 제한 정부(limited government)와 인민 스스로의 통치 간의 관계는, 민주화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현실 정치에서나 이론적으로나 정치인들과 행정 관료, 판사와 검사를 포함한 사법 행정 관료들, 그리고 학자들 사이에서 이렇다 할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필자가 이 에세이를 쓰는 동안 치러진 서울과 부산 시장 보궐선거 결과를 보면서 무엇이 예상을 뛰어넘는 격차로 민주당의 패배를 불러왔나를 생각하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적 헌법 체계와 관련해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이른바 사법 개혁과 검찰 개혁이었다. 대법원을 정점으로 하는 사법 행정 관료 체제를 근본적으로 쇄신하겠다는 사법부 개혁과 검찰 수사의 공정성을 구현하겠다는 검찰 개혁을 추진해온 민주당 정부와 의회의 개혁 조치는 문자 그대로 혁명적이다. 이 과정에서 사법 행정 관료 체계의 행정부에 대한 독립성은 완벽하게 소멸했고, 기존 사법 수사 기구의 중심에 있던 검찰은, 신설된 공수처, 경찰의 수사 기능 확장을 동반하는 검경 수사권 분할에 의한 두 개의 수사 기관 출현, (더불어민주당의 국회 발의로 예정된)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처) 등 4개의 수사 기관으로 분할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더해 정부와 입법자들은 궁극적으로는 검찰 수사권을 폐기하겠다고 말하기도 한다.

 

우리는 일찍이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이와 같은 대대적 사법 행정 기구 개혁의 동인이 어디로부터 발원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저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보도를 통해 알고, 짐작하는 지식이 이 역사적인 개혁에 대한 이해의 전부이다. 이 과정에서 검찰 기구 전체와 사법 행정 체계의 관련 법관들의 이미지는 “악마화”되곤 한다. 필자는 진정 그들이 촛불 시위 이전 전(前) 정권의 권위주의적 “적폐”와 구체제의 비리, 그리고 부패와 결탁한 장본인들이라고 믿지 않는다. 어쨌든 이 정도의 사법 개혁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안에 대해, 민주주의 국가라면 당연히 관련 당사자들과 전문가들 사이에서 심도 있는 논의를 거치고, 그러한 법안이 야당과도 협의되며, 나아가 시민사회의 공론장에서 광범한 토론과 의견 수렴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여러모로 이것은 한 정부의 임기 안에 이뤄지기 어렵다. 도대체 이런 개혁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이런 근거로 필자는 현재까지 이뤄진 입법화를 통한 사법 제도 개혁이 과연 민주주의 원리에 부응하는 것인가, 초법적인 것이 아닌가를 묻게 된다. 그런 개혁이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라고 입법자들이 말한다면, 다시 한 번 제임스 매디슨의 말을 인용할 수 있겠다. 『페더럴리스트』 10번에서 그는 “누구도 자신의 사안에 심판관이 될 수 없다”라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권력은 다른 권력의 법적 권위에 의해 견제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원리를 말한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삼권 분립의 원리이며, 매디슨의 주장에 따르면, 한 파벌이 입법부와 행정부 두 부서를 모두 관장하는 경우, 이를 두고 전제정(tyranny)이라고 규정하는 이유이다.

 

필자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최대의 위협은, 대통령으로의 권력집 중과 비대화로 삼권 분립이 사실상 부재하다는 데 있다. 물론 이것은 어제 오늘의 현상만은 아니다. 그러나 현 정부 하에서 이것은 민주주의의 가드레일을 부술 정도로 높은 위험 수준에 도달했다. 한국의 대통령은 고위 공직자 임명, 예산권과 조세권 등 정부 권력의 핵심 사안들을 모두 관장하며, 의회 권력이 이를 분점하거나 견제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2차 대전 이후 대통령의 권력과 권한이 확대되면서 삼권 분립의 약화를 걱정하고, 그런 약화가 트럼프 정부 하에서 미국 헌정 질서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하겠지만, 한국의 대통령제 하에서 권력의 초집중화는 한국 민주주의의 구조적 위기를 항시적으로 만들어내고 있다. 그런가 하면 헌법이 대통령 권력 행사에 대해 규정하는 조문들(예컨대 86조, 87조)은 그 자체가 형식화 내지 형해화되어 지켜진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이 한국 민주주의가 처한 조건이며, 이 조건은 한국 민주주의에 커다란 위험을 만들어내고 있다.

 

강력한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이 어떻게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 그 위험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말하고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퇴행을 막는 문제와 관련해 학자들은 여러 각도에서 다양한 처방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서도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이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를 사례로 말하는 정치 위기에 대한 처방은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도 큰 정합성을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정당들 사이에서 일방적인 권력 행사를 삼가는 것과 정당들 간의 동등한 권리를 강조한다. 이러한 불문율이 깨질 때 경쟁하는 정당은 헌법적 권한을 행사한다는 미명 하에 상대를 적으로 밀어붙이게 되고, 그것이 민주주의의 위기를 불러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특히 대통령이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을 자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미국 헌법은 대통령의 권리와 권력을 구체적으로 적기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집행부 권력이 스스로 자제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라고 말한다. 오늘의 한국 정치에서도 좋은 처방이 될 수 있는 제안이다.


 글  발췌: 열린연단

 

 

 

필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필자 사진이력 정보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

한일공동연구포럼 한국대표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연구회 회장

미국 Social Science Research Council 한국분과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