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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 초대석> 대통령제와 개헌 문제에 대한 하나의 상념,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을 줄이는 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현형 대통령 중심제가 대통령으로의 과도한 권력 집중을 불러오고, 그로 인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인식과 더불어, 대통령 중심제를 폐기해아 한다는 개헌 문제는 대선을 앞둔 시점이면 으레 이슈의 하나로 등장해왔다. 그렇지만 그 이슈가 이번 대선만큼 널리 또 강도 높게 제기된 적도 없을 것 같다. 언론, 정치학자들, 국회의장 주도하의 개헌 연구 프로젝트, 나아가서는 개헌 운동 단체, 정치 연구소 등은 청와대로의 권력 집중과 대통령제의 개헌을 주요 정치 개혁 이슈라고 말하고 있다. 한 저명한 정치인조차 개헌 문제를 대선 출마의 변으로 내세우고 있다.

 

왜 개헌 이슈가 그토록 중요한가에 대해 답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은 한국 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 하겠고, 그로 인해 한국에서의 민주주의발전이 저해된다는 사실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는 점일 것이다. 더욱이 바로 두 전임 대통령이 각각 탄핵과 민사적 위법에 의한 유죄로 현재 감옥에 있는 상태이다. 촛불 시위와 현 민주당 정부의 개혁 정책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하든, 우리는 민주화 이후 어떤 정부하에서도 볼 수 없던 강도 높은 정치적, 사회적 양극화와 그로 인한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험하기에 이르렀다. 앞선 시기 어떤 사태가 벌어졌든, 결과는 엄중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질문하게 된다. 한국 정치가 나빠져 오늘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의 가장 큰 요인이 대통령 중심제라는 제도의 문제 때문인가라는 질문이다. 필자의 생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권력 구조와 같은 한 정치 체제를 특성화한 제도의 효과가 정치를 좋게, 또는 나쁘게 만드는 데 결정 요소라고 보는 평면적인 “제도주의적 접근”이 지닌 설명력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이다. 제도는 여러 중요한 요소들 중 하나임에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만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특정의 정치적 결과에 대해 “제도가 문제다”라고 보는 것만큼 설명하기 편한 것은 없다. 그렇지만 그러한 설명은 결과를 보고 모든 잘못된 것을 그로부터 파생되는 것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사실 그러한 이해는 어떤 중요하고 복합적인 상호 관계를 갖는 다층적인 인과 관계를 설명하기 어렵다.

 

두루 알다시피 권력 구조를 중심으로 민주주의 정부 형태를 분류할 때, 대통령 중심제와 의회 중심제(우리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를 내각제라고 부르기도 하지만)는 정부 형태의 대표적인 두 유형이다. 그러나 또한 정부 유형의 제도 개혁을 주창하는 정치권이나 사회 일각에서는 그들이 이른바 “이원집정부”라고 말하는 일종의 중간 형태, 즉 국가의 의전적 수반으로서의 역할이든가, 또는 국방, 외교 같은 대외적인 영역을 관장하든가 하는 역할을 갖는 대통령과 그 밖의 일반 행정 영역을 관장하는 총리로 역할 분할을 갖는 혼합형 체제를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일종의 프랑스 모델을 상정하는 것이다. 정부 형태는 대통령 중심제이지만, 총리는 의회가 선출토록 해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과 의회 다수당이 다른 경우, 정부를 대통령과 총리가 분점해 통치하는 이른바 “동거 정부(co-habitation)”를 이상으로 말하기도 한다. 이 경우 대통령 권력과 총리를 의회가 선출할 수 있는 까닭에 국가의 수반으로서 대통령과 행정의 총책임자로서 총리 권력을 다른 정당들이 나누어 갖는 권력 분점이 가능한 체제(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프랑스의 동거 정부는 자크 시라크 정부 이후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주창자들은 한 동거 정부 를 통해 권력 독점이 아닌 분점을 실현할 수 있다고 그 장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다른 나라에서 하고 있는 제도 그 자체의 장단점보다, 의회 중심제를 한국에 수입한다고 해서 독일을 비롯한 중서부 유럽이나,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같은 정치를 재현할 수 있느냐 하는 점에 대해 여러모로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외국의 제도를 그대로 한국 정치에 이식한다고 해서, 이내 그 효과를 창출할 수 있다고 본다면, 그것은 정치적 유아(幼兒)에 불과한 순진한 생각일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문제의 해답을 찾으려는 것은 “평면적인, 단순한 제도주의적 접근(thin institutionalist approach)” 이상일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 양극화로 씨름하는 한국 정치와 민주주의의 문제점들을 다른 나라와의 제도적 장단점을 대비시키면서 대안을 찾는 것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나아가서는 위험한 것인가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제도는 제도만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법과 제도는 그것을 운영하기 위해 요구되는 규범이 존중돼야 하고, 그러한 사례들이 존중되고, 축적되면서 관습화되고, 정치 문화가 만들어져 실천될 때 제도 개혁이 뜻하는 목표가 이루어질 것이다. 즉 새로운 제도는 역사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제도의 문제는 특정 제도에 대한 역사적 경험들에 대한 축적과 더불어, 한 정치 체제를 구성하는 여러 층위, 여러 부분에서 사람들의 정치 행위의 “복합적인 제도적 렌즈(thick institutionalist lens)”를 통해 보는 접근 방식으로 문제를 보는 것이 필요하다.

 

한국 정치사에 있어 대통령제의 고고학이라고나 할까 하는 것을 짚어보는 것은 제도 문제를 이해하는 데, 여러모로 중요하다. 한반도에서 종전과 더불어 남북한에 각각 분단 국가를 건설하고, 남한에서의 국가 건설이 자유주의적 이념 위에 민주주의 체제 또는 “민주공화국”이 미군정하에서 설립되었다는 것은 두루 아는 사실이다. 전후 미군정하에서 민주주의가 건립된 나라는 유럽에서의 서독, 아시아에서의 일본, 그리고 우리나라 그렇게 세 나라였다. 그러나 전전(戰前)에 이미 유럽식, 특히 프러시아, 전간기(戰間期) 바이마르, 오스트리아 공화국과 같은 독일적 유럽식 모델을 전후 미군정하에서 부활시키고, 발전시키게 된 서독과 일본과는 달리, 한국은 그러한 민주주의의 전사(前史)가 없었던 까닭에 거의 백지 상태에서 새로운 헌법과 정부 형태를 건립하게 되었던 특성을 갖는다.

 

그렇지만 해방 후 일본의 영향을 받은 헌법 이론을 통해 바이마르, 오스트리아식 의회 중심제를 부분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은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미국 헌법과는 달리 정당을 헌법 기구로 규정하는가 하면, 사회경제적 복리를 명시적으로 설정했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대통령 중심제를 중심으로 하면서, 지방 자치와 상하 양원제(1952년 발췌 개헌을 통해) 안은, 미국 헌법을 모델로 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초대 대통령은 제헌의회에서 간접 선거를 통해 선출됐지만, 다음 2대 국회에서 이른바 “발췌 개헌안”의 처리라는 비정상적 개헌 방식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로 전환된 것임은 두루 아는 바와 같다.

 

민주적 정치 제도의 작동에 있어 이 모든 비민주적 개헌 방식은 2대 국회의 구성 직후 6·25 전쟁이 발발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비로서 이해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우리가 민주화 이후에도 해온 대통령 중심제의 시발이다. 한국의 초기 대통령 중심제는 정치 리더를 중심으로 한 것, 지방 유지에 의해 대표되는 명사(名士) 정당적 성격이 아니고서는 사회의 일정 부분을 대표할 수 있는 기초가 존재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시행됐다. 그것은 민주화 이후에도 상당 기간, 상당 정도 지속된 바 있었고, 지금도 사회에 다원주의적 기초를 갖고, 그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정당의 구조는 “포괄 정당”적 성격을 본질로 한 것이라 하겠다.

 

그와 동시에 공산주의에 대응할 수 있는 것이 냉전하 한국 국가 건설의 목표였다는 사실로 인해 적어도 이념적, 제도적으로 민주주의였을 뿐, 내용적으로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역사적 이념적 자원을 발전시킬 수 있는 토대가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인 조건이 존재한다. 그 위에 전쟁이 덮씌워졌다. 강력한 국가 권력이 대통령으로 집중된 권력의 구조를 통해서만이 통치되고 운영될 수 있었고, 또 그러한 조건을 통해 북한 체제에 대응해야 하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이 모든 비민주적 요소들을 대통령제의 문제로만 돌리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를 통한 설명 방식일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런 조건하에서 대통령 중심제는 중요한 역사적 기능을 갖는다는 사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서 제도의 효과라는 측면을 고려에 넣고 검토해봐야 한다고 믿는다. 제2공화국의 의회 중심제 정부 형태는 한국의 정치적 조건에서 하나의 실패작으로 선례를 남긴 부정적 사례로 이해될 수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대통령 중심제에 대한 중요한 선택이 가능했던 것은, 1980년대 민주화에 의한 5년 단임제 대통령제를 근간으로 하는 87년 “민주 헌법”을 만들 때였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대로의 정치적 조건들을 갖는다. 경험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성공한 선례를 갖지 못한 조건하에서 민주화 투쟁 시기 민주화의 목표로서 가장 중요한 슬로건은 무엇이었나. 그것은 아마 “우리 손으로 직접 뽑는 대통령”이 아닌가 한다. 즉 한국에서의 민주화는 곧 직선제 대통령을 선출하는 것이다. 민주주의하에서 대통령 중심제는 그것으로 결정된 것이다. 이렇게 단순 명료한 구호가 대통령 중심제를 한국 민주주의 정치 체제의 중심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도록 했고, 우리는 그것의 긍정적인 측면과 아울러, 동시에 부정하기 어려운 역기능을 또한 경험하기에 이르렀다.

 

왜 5년 단임제였는가 하는 비판도 많다. 그렇지만 당시 민주화에 기여한 중심적인 정치 세력이 5년을 사이클로 교차 집권할 수 있는 가능의 공간을 연다는 것은 당시의 여건으로 결코 비판의 대상일 수는 없다고 믿는다. 어느 면에서는 촛불 시위와 문재인 정부의 경험이, “개혁의 조타수”로서의 대통령의 이미지의 소멸이 아니라면, 그 효능의 상실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개혁의 부족함의 결과물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개혁의 성급함과 과도함이 불러온 정치적 문제점들, 한국 민주주의의 전개가 여기저기서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측면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는 사실이다. 즉 정치적 퇴행이 오히려 정치 발전을 압도하는 경우들이 더 많아지게 됐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 1980년대 민주화 이후 지속돼온 5년 단임제 대통령 중심제의 긍정적 역할이 전무했다고 완전히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수는 없다. 필자의 생각으로 5년 단임제가, 민주화 이후 어떤 정치 지도자, 어떤 정치적, 또는 사회적 세력, 어떤 정권도 5년 이상 집권하는 것을 허용치 않도록 하는 데 확실하게 기여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정치적 순환을 제도적으로 강제하고, 정치 세력들 사이에 교차 집권을 촉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그러한 방식으로 적어도 지금까지는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라 할 정권 교체의 제도화를 실현했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3.

대통령 중심제를 부정하거나, 비판하는 관점에서는, 그 자체가 국가 권력의 정점에 위치한 대통령으로 권력을 집중화한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이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본질인 헌법을 기반으로 하는 법의 지배를 약화 또는 무시할 수 있는 권력의 집중화를 실현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대통령을 정점으로 하는 집행부 권력의 비대화는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근본 원리로서 3권 분립과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견지하기 어렵게 한다. 이것이 동반하는 폐해가 행정관료 중심의 국가 권력을 비대화하고, 시민사회의 다원주의적 구조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창출한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대통령은 국민에 의해 대표로 선출되지만, 선출됨과 동시에 법의 지배로부터 벗어나, 그를 선출해준 국민에 대한 (설명)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권위주의적 또는 포퓰리스트 통치자로 나타난다. 필자 역시 많은 세계의 여러 정치학자들이 말해온 그러한 관점에 공감하고 있고, 또 그렇게 말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민주주의가 포퓰리즘 또는 권위주의적 정치현실을 구현하게 되는 것이 앞에서 말한 것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정치 체제를 구성하는 여러 부분들의 특성들이 결합되는 양태에 보다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여기에서 입헌적 민주주의 국가이자, 또한 대통령 중심제의 모델 국가이기도 한 미국 민주주의가 어떻게 약화 내지 퇴락하고 있는가를 주제로 한 책 하나를 소개하고자 한다. 아직 한국말로 번역되지는 않았지만, 수잔 메틀러, 로버트 리버만이 공저한 『네 가지 위협: 미국 민주주의에서 반복되는 위협들』(2020)인데, 저자들은 여기에서 미국 연방 국가의 건설이래 현재 트럼프 정부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어떤 상황에 놓일 때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게 되는가를 진단하고 있다.

 

그들은 미국의 230년이 넘는 민주주의의 역사를 통해 나타난 여섯 차례의 위기를 분석하면서 네 가지 위협—정당 양극화, 인종 문제를 둘러싼 갈등, 경제적 불평등의 심각한 심화, 대통령의 집행부 권력의 확대 강화—을 제시한다. 그들의 분석의 결과는, 이들 네 가지 위협이 동시에 정치를 강타할 때 미국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인종 문제를 제외한다면, 정당 양극화, 경제적 불평등, 집행부 권력 확대라는 세 가지 위협은 한국의 민주화 이후의 조건으로 불러들인다 해도 많은 설명력을 가질 수 있을 것임에 분명하다.

 

국민총소득의 최상위 1%가 국민총생산의 20% 이상을 차지하는 극단적인 소득 불평등이 한국적 현실과는 거리가 멀어 제외한다면, 현재 한국의 사회경제적 조건을 유럽 수준으로 발전시키는 문제는, 오늘의 한국 경제 발전의 수준으로 볼 때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정치 영역에서의 정당 양극화와 집행부 권력의 확대 강화야말로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의 원천으로 중심에 자리 잡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다.

 

4.

한국의 현행 대통령 중심제를 의회 중심제와 같은 다른 어떤 정부 형태로 헌법 개정을 통해 전환하는 문제는 매우 과격한 대안이다. 필자는 후안 린츠가 말하고 있는 것, 대통령 중심제보다 의회 중심제가 더 우월하다는 주장에 동감한다(Juan J. Linz, 「The Perils of Presidentialism」, 《Journal of Democracy》, Vol. 1, No. 1, Winter 1990).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중심제로부터 의회 중심제로의 주장에 동의하기 어려운 것은, 종전 이후 냉전하에서 분단 국가의 건설, 권위주의의 경험과 민주주의의 역사를 통한 경험들의 축적과 한국적 정치 현실이 그것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는 2019년 말, 20대 국회 말에 (국민의힘을 제외한) 정당들이 만들어낸 선거법 개정이 비례대표제를 다소간 확대하려는 원래의 의도를 벗어나, 소선거구제와 지역 비례대표제를 정파적 이해관계로 무원칙하게 혼합하여 정치사에 남을 악법을 만들어낸 나쁜 기억을 갖는다. 옛것이 개정된 법보다 월등 나은 법으로 남게 됐다.

 

그러나 정부 형태를 바꾸는 헌법 개정은 선거법의 개정과는 비할 수 없이 어려운 문제이다. 현행 5년 단임과 4년이든, 5년이든 연임의 허용을 선호하는 대통령 중심제 내에서의 이견, 그리고 대통령 중심제와 비례대표제의 상대적 우열을 판단하고, 이 모든 갈등과 이견을 가리는 문제가 있다. 그런가 하면 깊은 균열에서 허덕이는 정치적 갈등, 양극화를 넘어 좋은 제도의 대안에 이르는 합의의 과정을 어떻게 창출해 낼 수 있는지, 숱한 난관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필자는 개헌을 통한 정부 형태의 변화라는 급진적인 그러나 그 효과도 불확실한 선택에 대해 부정적이다. 따라서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을 완화하고자 하는 방식은 헌법과 현실을 그대로 두고 대안을 발견하려는 것을 출발점으로 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을 완화하고, 민주주의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을 더 확대할 수 있는 정치적 실천을 통해, 그리고 있는 현실에 기초하여 개혁을 추구하는 온건한 선택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한 필자의 관심은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하나는 기존의 헌법의 운영의 묘를 살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당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다음에서 몇가지로 요약해본다.

 

첫째, 헌법에 있는 것만이라도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원리에 따라 법을 실천한다면, 대통령으로의 권력 집중을 완화하고, 의회와 정당으로 권력을 분할할 수 있는 것이 가능하다. 국무총리, 국무위원, 국무회의를 규정하는 헌법 86조로부터 89조는, 그것이 사문화된 것이 아니라면, 그 법조문들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원리에 기초하여 실천하는 것과 별다른 연관성이 없다. 미국의 헌법은 대통령이 정치 현실의 실천 과정에서 어떻게 행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대통령과 집행부의 역할에 대해 헌법 조문을 통해 명시적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대통령과 집행부의 행위의 대부분은 행위 규범의 축적을 통해 3권의 부서 간 역할의 규칙들이 존중되고, 시행돼왔다.

 

미국 헌법과 비교의 관점에서 볼 때 한국의 헌법은 대통령과 국무위원, 국회가 할 역할이 훨씬 상세하게 규정돼 있다. 만약 이 법들이 3권 분립의 원리를 존중하고, 제대로 시행된다면 대통령 권력은 국무회의에 의해 분할될 수 있고, 국무총리와 각료의 임명도 국회의 역할로 이양되는 것이 가능하다. 더 적극적으로 이 조항들이 활용된다면, 여소야대 국회가 선출한 총리가 각료 임명도 할 수 있는 여지도 있어, 프랑스의 “동거 정부”와 같은 형태도 가능할 수 있다.

 

이러한 가능의 여지를 생각한다면, 현행 헌법은 제헌 헌법으로부터 내려오는 유럽식 의회 중심제의 요소를 많이 포괄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대통령 스스로가 규범을 실천하기로 대선 공약을 통해서나 다른 기회라도 공약을 천명한다면, 또는 헌법재판소가 그렇게 평결한다면, 총리를 의회가 형식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 추천할 수 있고, 여소야대의 경우 국회가 총리를 선출할 수 있어, 지금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 대통령의 집행부 권력이 국회로 이양되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방식으로 대통령의 많은 권력이 국회와 정당으로 이양될 수 있다.

 

둘째, 정당은 하나의 민주주의적 정치 체제가 민주적일 수 있도록 하는 정치적 결사체이다. 사회의 대표 기능을 수행하는 정당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거나, 취약한 조건에서 우리는 민주주의 발전을 상상하기 어렵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민주화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에서 정당은 두 요인으로 인해 취약하다. 하나는 대통령 권력의 강함에 비해 거의 반비례적으로 정당의 역할이 약화되고 제약되기 때문이다. 정당은 대통령에 의해 자신이 하기로 돼 있는 역할로부터 소외된다. 정당을 약화시키게 되는 것은, 지금까지 우리의 경험으로 미루어볼 때 대통령 중심제의 중요한 약점이자, 한계이다.

 

미국의 사례와 비교해보더라도 한국 정당의 특징은 잘 드러난다. 미국 헌법의 이론적 기초를 놓은 『연방주의자 논설들』이 정당을 포함하는 파벌을 부정하고 있다 하더라도, 미국이 연방 국가를 만드는 것과 그 과정에서 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는 파벌의 출현과 그것의 중심적 역할은, 헌법이 작동하기 시작한 1790년대 시점에서 처음부터 출현했다. 현대 민주주의 이론에 기초를 놓은 로버트 달은, 야당의 출현이 민주주의 발전 단계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표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약한 대통령과 정당 중심 민주주의가 발전한 미국과는 달리, 한국의 민주화는 강한 대통령과 약한 정당체제로부터 시작돼 현재에 이르렀다. 한국의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정당이 대통령 권력으로부터 자립성을 발전시켜야 하고, 선거를 위해 정당 후보로서 대통령 후보와 국회의원 후보를 선별할 수 있는 문지기적(gate-keeping) 역할을 강화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비 선거나 대통령 선거의 본선에서 캠프와 같은 별도의 선거 조직이 아닌, 당 중심의 선거 운동이 필요하다. 요컨대 정당은 대통령을 만드는 정치적 결사체이지, 대통령이 정당을 만드는 것은 역할 전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한국의 정당은 사회와의 연계를 상실하고, 누구를 대표하는지에 대한 대표 기능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당의 구성이, 단지 다양한 사회로부터 인기 있는 미디어 스타들이나, 전문가 집단들의 결합체에 불과하다. 사회의 부분 이익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정당을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셋째, 한국 헌법에서 대통령의 임기는 5년 단임으로 상대적으로 짧다. 이 점이 개헌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현행 헌법이 정책의 연속성을 구현할 수 없다는 주장을 펼 수 있는, 개헌의 중요한 논거로 제시하는 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필자는 단임 임기제 헌법을 정책의 연속성이라는 기준에서 평가하면서, 그것을 약점이라고 보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중대 이슈에 관련된 것이라면 정책의 연속성은 특히 중요하다.

 

그러나 필자는 평소 한 임기 내에 대통령이 입안하고, 법안 또는 정책으로 만들고, 완성하겠다는 발상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그렇게 되면 한국은 단임제 대통령하에서 거대 정책 기획, 그것을 추진하고 완성하기 위해 혁명적 개혁을 주창하게 되고, 모든 정권들이 거대 개혁꾼이 돼 경쟁하는 구조가 될 것이다. 실제로 민주화 이후 한국의 대통령들과 그가 이끌었던 정권들이 그런 방식으로 경쟁해왔다.

 

과연 그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필자는 이러한 틀에서의 정부 운영 방식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주요 정책이 진정으로 중대 이슈라면 여러 정권을 통해 지속돼야 할 중대 이슈임에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것은 한 정권의 단임 대통령의 역할이 아니라, 정당의 역할이다. 따라서 이 점은 5년 단임제의 대통령 중심제하에서 더욱 정당이 제 역할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의 정당이 179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민주당, 공화당으로 지속돼왔다면 그것은 몇 년인가. 영국의 토리, 휘그는 그보다 더 오래됐다. 독일 정당을 사례로 든다면, 사회민주당은 130여 년이 훌쩍 넘었고, 기독교민주당은 역사가 무척 짧다고 하겠는데, 그렇지만 2차 대전 종전 직후에 새로 창건돼, 그때부터 지금까지 70년이 훌쩍 넘는다. 한국의 정당은 어떠한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해, 정당 이름보다 대통령의 이름을 앞에 붙여, 노무현 정당, 박근혜 정당이라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한 호명이 또한 한국 정당의 대통령의 영향, 정권의 창출과 특성을 그런 대로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다.

 

현재 대선을 앞둔 한국 정치에서 언론이나 사람들은 덮어놓고 “협치”를 대통령 후보와 정당 정치인들이 추구해야 할 덕으로 강조 또 강조한다. 그러나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그저 공허한 말일 뿐이다. 경쟁하는 정당들은 지금부터라도 일관된 이념과 가치, 비전과 정책 대안들을 발전시켜야 될 것이다. 대통령 후보든, 정당 정치인들이든, 그들의 가치와 이념, 목표에 복무하는 문제를 진지하게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중요한 문제 영역, 정책 대안들, 예컨대 북핵 문제를 포함하여 남북한 간 평화의 관리 내지 제도화의 문제, 그것을 위한 동아시아 국제 정치 질서에서 플레이어로서 취해야 할 정책의 문제, 시장 운영의 원칙과 경제 성장 문제, 사회복지 정책의 문제, 인구 감소와 세대 간 격차의 문제와 같은 중대 문제에 대한 장기적 비전을 설정하고 정책 대안을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이념, 비전, 정책 대안을 창출해내는 과업이 곧 정당의 중심적인 역할이어야 한다면, 필연적으로 진보적 정당과 보수적 정당 사이의 차이가 표현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한 상황이 될 때, 또는 그러한 상황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경쟁하는 정당들은 다른 대안들을 제시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만들어지면서, 또는 만들어진 다음에 정당들 간의 협치라는 말이 의미를 갖게 된다. 정당 사이의 비전과 정책 대안이 다를 때,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일 때 협상과 타협의 필요가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과정을 거친 다음 비로소 협치라는 말은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예컨대 독일이 “동방 정책(Ostpolitik)”을 추진한 방식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닌가. 동방 정책의 창안자는 1960년대 말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였다. 그런데 그 결과를 거두어들인 사람은 (그것이 동서독 통일을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1980년대 말 사민당이 아닌 기민당의 헬무트 콜이었다. 그리고 그 정책을 직접 실행에 옮긴 사람은 어느 정부가 들어섰든 무려 18년 동안이나 외교부 장관을 했던 자유민주당의 한스-디트리히 겐셔이다.

 

그리고 지금 독일 경제를 운영하는 원리로서 “사회적 시장경제”는 2차 대전 이후 승전 연합국 군정 통치하에서 기민당의 에르하르트가 만든 것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의 5년 단임제 대통령 중심 체제하에서도 여러 다른 정부들을 거치면서 정책의 지속성을 구현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적 합의를 필요로 하는 정책 영역에 있어 그러한 지속성은 반드시 정부 형태가 의회 중심제나, 대통령 연임제를 필수적인 조건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열린 연단- 발췌


필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

필자 사진이력 정보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

한일공동연구포럼 한국대표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회 위원장

한국정치연구회 회장

미국 Social Science Research Council 한국분과 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