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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영 논설위원 '공감과 소통의 동상이몽'

inside people 논설위원

시대의 흐름을 딱히 언급하지 않아도 개개인이 가진 공감 능력은 정답이 없을 정도로 방대함을 살면서 느꼈을 것이다. 그런 공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주도권도 또한 각자에게 있음을 안다.

이러한 공감의 집합을 소통이라 생각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감히 딴지를 걸어보고 싶어진다.

 

완전한 혈연의 내 편이라는 가족 구성원도 개성이 다 다르고 그 어떤 조직체라도 공감하는 바가 당연히 같을 수는 없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라는 말을 비아냥스레 하면서도 정작 그 모습을 안 하고 사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기에 우리는 상대의 감정을 살피며 어긋남이 없고 나쁘지 않은 기분에 상처는 제쳐두고라도 논리적인 상대의 주장이 충분히 세뇌가 되는 것을 공감이라 여기는 소수나 다수의 집합체가 소통된다는 착각을 한다는 것이다.

 

남의 감정과 말을 얼마나 살피고 수긍을 해야 소통이 되는 것일까?

사소한 일상의 일반적인 타인과의 대화에서도 공감을 일으키려면 무조건 들어주는 쪽이 있음으로 절대다수가 긍정적 소통이라 만족을 느낀다는 생각을 수없이 하고 살았다.

사실 상대의 말에 토를 달거나 반대의 의견을 내면 결국 그 대화는 인내심 없고 상대를 몰라 들이댄다는 꼴로 다툼이나 욕설로도 치닫는다, 대화가 됐든, 토론이 됐든, 연설이 됐든 말이다.

 

결국 감정을 살펴야 하는 거대한 조직에서의 공감은 필요에 의해 잘 짜인 소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아니면 소외되므로 묻어가야 하고 각자의 공감은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다. 그러나 그건 욕이 아니다.

단지 말하는 대로 듣고 다 상대의 말이 옳다고 듣는 사람도 그럴 것이라 믿는 소통에 목 매인 자들의 일관된 생각은 아닐까? 결국 자기 자신의 진짜 감정 따위는 접어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극히 사소한 순간에 같은 생각으로 공감의 기준을 두는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의 말만 잘 들어주고 옳다고 맞장구로 오롯이 편이 되어주는 사람과는 누구든 소통이 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 하는 경우, 이유가 있든 없든 간에......,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관계의 문제가 공감인가 아닌가를 좌우한다.

설상 다 들어준 뒤 속으로 흉을 보든 욕을 하든 내뱉지 않으면 그 속을 누가 알 것인가 말이다.

 

글로벌 시대로의 변화에 많이 등장한 말이 공감, 소통, 상생이다.

감정이 불필요하고, 인공지능에 길 들여지며 대화 자체가 사라져가는 핵가족에 혼족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것의 대안으로 소통과 공감을 강연한 인문학의 어필도 다양해질 수밖에......,

 

그러니 공감 능력은 상대적이고 소통은 맞춤형 소통일 수밖에 없어졌다.

공감은 절대적이야 한다. 절대적으로 개개인의 감정이 타인과 같을 때

비로소 공감하는 소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진정성 없이 거론되는 세대교체, 앞서가는 청년세대......,

세대교체라는 말은 교체 없이 말만 되새김질한다.

나도 내가 아니고 내 편도 내 편인지 아닌지 분별력 없이 상황에 따라 움직이는 아바타처럼 말이다.

 

한국인들은 특히 홧병이 많다는 구시대적 발언이 요즘은 스트레스라는 외래어로 말의 형태만 바뀌었다.

예전엔 참고 살았고 요즘은 화산폭발처럼 이어져 공개적 이슈가 되고 있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자신의 감정도 다스리지 못하면서 타인의 감정 따위가 뭐가 중요함을 알겠는가......, 그러한 개개인의 감정 소모는 절대 공감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거친 감정으로 비판과 욕설로만 가득한 정치판의 입질이나 언론의 자유를 마치 합법적으로 까는 형태의 매체 또한 사실이든 아니든 비판을 일삼고 그 비판에 공감대를 한낱 재미로 끌어내려 한다는 생각도 기분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온전히 같은 생각,그렇다고 느끼는 공감이 아니라는 것이다.

 

언젠가 철학형 논리학 이론에서 분명한 진리인 배중률(排中律)의 정의를 접한 적이 있었다.

한참을 들여다봤었다. 쉽지 않은 논리에.... 대단한 지식인도, 이해력이 출중한 사람도, 입만 열면 모터를 단 듯 말만 잘 하는 사람도 아니기에 이해를 구하는 온갖 이성과 감성의 공감 능력을 집중시켰었다.

 

요약해서 풀자면 명확한 역설의 분명한 진리가 배중률이다.

어떠한 명제와 그것의 부정 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참이라는 법칙을 이른다. 결론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의 판단 이 모두 참이 아닐 수는 없다는 원리이다.

 

굳이 이 어렵게 느껴질 이론을 얘기한 이유는 일반적인 말로 사람들이 흔히 쓰는 공감과 소통이 다를 것이 없대도, 공감과 소통을 별개라 해도, 배중률에 모순되는 형태로의 역설에 갖다 붙여본다 해도, 우리들이 알아야 할 분명한 것은 이타적인 공감과 소통을 고집하지 말자는 것이다. 각자가 느끼는 감정은 개인의 것이다.


진짜 이기적인 게 진짜 이타적일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겠는가?

이기적일지언정 타인의 감정에 끌리지 말고 각자의 분명한 감정들이 모여져 진정한 공감을 이루고 그 공감들이 소통을 이루는 첫걸음이 아닐까?라고 여기며 변변찮은 서술을 한다.

생각과 행동이 같다 해서 마음마저 같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사는 건 아닐는지......,

제대로 느끼고 제대로 화를 내자. 온전하지 못한 공감과 소통은 영원히 동상이몽에서 깨지 못할 것이다. <김선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