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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1세'와 '엘리자베스2세' -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엘리자베스1세 여왕
  • 기사등록 2022-09-20 14:22:41
  • 기사수정 2022-09-20 14:2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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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2세 여왕


영국의 가장 오랜 군주였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지난 9월19일 영국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영원히 잠들었다. 지난 70년 재위 내내 영국은 물론 세계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아온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지난 9월 8일 별세했고 왕위 계승권자인 여왕의 큰아들 찰스 왕세자가 즉각 찰스 3세로서 국왕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즉위하면서 '내 삶이 길든 짧든 평생토록 국민을 섬기는 데 헌신할 것임을 여러분 앞에 선언합니다.'라고 선언했고 수 십 년 동안 만민의 사랑을 받아왔다.


엘리자베스2세 여왕과 엘리자베스1세 여왕은 어떤 관계일까?


400년 전의 엘리자베스1세와는 머나먼 친척 정도이고 엘리자베스1세 여왕이 워낙 뛰어난 여왕이었기에 그 맥을 잇기 위해 엘리자베스 2세라고 불리워진 것에 불과하다. 다만 엘리자베스 1세는 정치적으로 군사력으로 영국을 지배했다면 엘리자베스 2세는 정신적으로 영국을 지배헸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다.  


                                         엘리자베스2세 여왕


본보에서는 엘리자베스2세 여왕의 별세를 계기로 엘리자베스1세 여왕의 삶을 다시한번

조명해 본다.......... 




엘리자베스1세 여왕


   화려한 초상화


‘위대한 영국 건설한 엘리자베스1세...‘권력은 군대가 아니라 국민의 손에서 나온다’


독일의 역사학자 위테크는 “신은 누군가를 멸망시키기에 앞서 뜨거운 권력을 누리게 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하지만 영국의 엘리자베스1세 여왕은 절대 권력을 물려받았지만 ‘민심에 의한 통치’로 재임 44년 동안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다’는 후세의 평가를 받을 만큼 강력한 여왕이자 군주였다. 그의 강력한 왕권은 정치적 기반이나 군대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국민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누군가의 말처럼 “진정한 엘도라도는 다이아몬드와 황금이 아니라 평화와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이다”라고 했듯 엘리자베스1세는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는 ‘세기의 연인’이 되었기에 존경받는 왕권을 유지, 발전시켜 올 수 있었다. 본보에서는 창간특집으로 ‘여왕 엘리자베스1세’와 극적인 인터뷰를 가졌다. <편집자주:편의상 ‘여왕’으로 부르기로 한다> 


-여왕께서는 1603년 이후 420년 여 만에 한국에서 다시 세인의 주목을 받는데 소감 한마디 부탁합니다.


“호호호...제가 워낙 뛰어난 여걸이고 미인이고...스러져가는 영국을 해가 지지않는 나라로 만들었으니 세월이 흘러도 나를 롤모델이자 멘토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이 많은 가 봐요.”


-여왕으로 즉위하기 전 남다른 고충을 겪으셨는데 그 지독했던 과정이 어땠습니까? 


“저의 아버지 헨리 8세에게는 6명의 부인이 있었어요. 첫째 왕비였던 캐서린과의 사이에 메리 언니가 태어났지만 아들을 못 낳았기 때문에 이혼을 했고 두 번째 왕비였던 앤 블린이 저를 낳았죠. 그런데 어머니도 결국 아들을 낳지 못하고 억울하게 처형당했습니다.

그 후에도 아버지는 여러 왕비를 거느렸는데 그들 중에서 아들 에드워드가 태어나 아버지의 뒤를 왕이 됐지만 병으로 죽었고, 헨리 7세의 증손녀인 제인 그레이가 즉위했지만 불과 9일 만에 왕위에서 쫓겨났고, 언니 메리가 즉위했지요. 그 무렵 유럽에서는 종교 개혁이 시작돼구교 카톨릭과 신교인 프로테스탄트(국교회)가 피비린내 나는 종교전쟁을 벌이던 중이었는데 언니 메리 1세는 구교를 신봉하고 신교도들을 심하게 탄압했어요. '블러디(Bloody) 메리'라 불릴 정도였지요. 

그때 '와이어트의 난'이 일어났는데 누군가가 제가 관련돼 있다는 헛소문을 퍼트려 런던탑에 갇혀 죽을 뻔 했는데 가까스로 풀려났지요. 에드워드가 왕이었을 때도 토머스 시모어의 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취조를 받다 풀려나기도 했어요. 죽다가 살았으니 덤으로 인생을 산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런 죽을 고비를 겪으면서 단련이 되어 여왕께서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여왕으로 평가받게 되었는데 우리나라에서도 역사상 첫 여성대통령이 탄생하기도 했는데 여성이 일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것에 대해 어떤 생각이신지요?선


“박근혜 전 대통령 소식은 들었지요. 한국에서도 ‘암탉이 울면 나라가 시끄럽다’는 말이 있지 않나요? 영국도 이와 비슷한 속담이 있을 정도로 남성위주의 세계속에서 여성이 한 나라의 통치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죠.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여성 대통령이 탄생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지금 투옥중이라는 얘기를 들으니 안타깝군요. ‘셈페르 에어뎀(semper eadem)’...‘한결 같은 마음으로 국정에 임하라’ 제 신조였답니다.”


-아시겠지만 지금 수많은 여성 지도자들 중에는 당신을 롤모델로 멘토로 삼겠다는 말을 하고 있답니다. 당시 ‘황금시대’를 열게 된 당신의 국정철학은 무엇이었습니까?


“저를 롤모델로 삼겠다니 고마운 일이죠. 당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준비된 여왕’으로 생각했지요. 영국은 오랜 세월동안 국가와 종교간 갈등이 있어왔고 또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도 치열한 종교분쟁이 있었는데 종교분쟁을 해소하는 것을 국정의 최우선 목표를 두었죠.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노선을 지향한 거죠. 그렇게 우리 국민들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그래서 세계최강을 자랑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했죠. 영국의 힘을 보여줬기 때문에 국민들은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어요. 솔직히 말해서 나보다 좋은 여왕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나, 나만큼 국민을 더 사랑하는 여왕은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거예요. 호호호.”


   대관식을 가질 때의 모습


-당시 제대로 된 해군도 없을 때였는데 세계최강을 자랑했던 스페인 무적함대를 물리쳤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인데 어떻게 가능했던 거죠?

 

“전쟁도 정치도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와 신뢰가 있으면 소수로도 다수를 이길 수 있는 거죠. 당시 우리 영국은 의회와 상인의 힘이 어마어마했죠. 제가 비록 왕이라 하더라도 먼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마음을 잡기 위해 노력했고. 상인과 의회의 요구를 최대한 수용하기 위해 노력했지요. 아마 의회에서 저보고 결혼하라는 것 말고는 의회의 요구를 거의 다 수용할 정도였으니....그런데 1588년에 스페인 무적함대가 침공한거죠. 저는 그때 의회와 상인들에게 말했어요. ‘내가 연약한 여자이지만 국민들이 내게 부여해준 영국 왕의 심장을 가지고 있습니다.’라며 애국심에 호소했죠. 그리고나서 상인들에게 15척의 선박과 5,000명의 군대만 보내주면 적을 물리치겠다고 했는데 상인들이 상선 30척과 1만 명의 군대를 지원했고 전국 지방 귀족들도 자발적으로 지원을 했죠. 이런 국민의 충성심이 스페인을 물리치는 힘이 된거죠.”


-참 대단한 리더십을 발휘한 거로군요. 그렇게 해서 재임 44년 동안, 어마어마한 기간동안  국정을 잘 펼쳐서 ‘파산직전의 영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죠.   


“우리 영국이 지금까지도 존경받는 왕권을 유지하는 이유는 바로 왕이 자체적으로 군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거죠. 흔히 군주들은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어야 왕권이 강화된다고 믿는데 그것이 군주를 유혹에 빠트리게 되는데...우리 영국은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국민에게 부담이 되는 정책은 하지 않는다는 거였죠. 일단 세금을 올리지 않으려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고 전쟁을 하지 않았고 전비 모금이나 청년들의 동원도 최소한으로 줄였고, 어마어마한 궁궐을 짓거나 거대한 파티를 여는 것으로 국민들의 원성을 사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고요. 

피치 못해 전쟁을 치르더라도 세금 인상을 피하기 위해 거상(巨商)들에게 각종 전매특허를 주는 식으로 전쟁 자금을 충당했고 물가가 올라 원성이 높아지면 의회에 나가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거죠. 1601년 11월 30일 제가 했던 ‘골든 스피치’를 잘 아시죠. 군주가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데 용서하지 않을 국민이 있겠어요. 권력을 가진 여왕이 아니라 부드러움과 약한 여자, 국민의 편에 서는 군주라는 인식이 그 어떤 것보다 강하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죠.”


-그러니까 여왕께서는 권력이란 것은 군대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손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노력하신 것 같군요.


“그렇죠. 권력은 국민의 손에서 나오는 거죠. 저의 조부 헨리7세는 30년 동안 치른 장미전쟁을 견뎌냈고 적이나 다름없는 가문의 공주를 아내로 맞아 화해시켜 강력한 왕권의 기반을 다졌고 귀족들도 전쟁을 거치는 동안 거의 폐족 지경에 이르렀지만 저는 귀족들을 힘으로 밀어부치거나 독주하지 않았고 의회나 귀족을 상대로 대결을 벌이지도 않았지요.

그리고 저는 1년에 두 차례 이상 반드시 민심대장정을 나섰다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제가 민심대장정을 나서면서 여왕의 권위를 자랑하기 위해 삼엄한 경호나 의전을 받지 않고 홀로 복잡한 시장통으로 나가 민심을 청취하기 위해 노력했지요. 지방 순찰 때는 관리들을 아낌없이 칭찬했고 사전에 수하를 보내 혹시 그 도시 시민들이 가장 염원하는 민원이 있는지 알아봐서 현장에서 즉시 해결해 주기도 했죠. 간혹 지방 귀족 집에 초대받아 가면 그 집 안주인의 요리 솜씨 칭찬을 반드시 했고 종복에게까지 감사나 선물을 전했고요...”


-여왕께서 직접 민심대장정을 나섰다는 것이 대단히 이례적이었습니다, 당시 국민들을 위한 사회복지정책도 획기적이라는 평가도 있는데 어떤 내용들이었죠? 


“당시 경제를 살리기 위해 모직물을 육성하는 산업에 치중하다보니 농민들이 일터를 잃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이 많아 사회문제화 됐는데 구빈법 또는 튜더구빈법으로 불리는 사회복지정책을 제정했지요. 그러니까 가령 근로의욕을 꺾는 구걸을 금하고 개인적인 자선행위도 금지했지요. 반면에 구빈세를 제정하여 사회복지비용을 마련했고요, 노동능력이 있는 사람은 공공사업을 통해 일을 하게하고, 노동능력이 없는 사람(장애인, 노령자 등)은 구빈세로 보살핀다는 것이죠. 특히 ‘교화소’라는 걸 두어 일할 의욕이 없는 자나 게으런 자들은 강제노역으로 처벌했다는 점이 일반 사회복지정책과는 조금 다른 파격적인 정책이었죠.”

     

-게으런 자들을 처벌했다? 좀 특이했네요. 조금 개인적인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소문을 들으니 에스파냐 왕인 펠리페 2세, 스웨덴 왕, 프랑스 왕자들로부터 청혼을 받았는데 ‘국가와 결혼했다’고 선포하고 독신을 고수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영화의 한 장면


“당시 우리 사회는 노처녀를 보면 동화 ‘잠자는 공주’ 속에 나오는 ‘물레 돌리는 마녀’라고 부를 정도로 독신을 금기시했는데 여왕인 제가 독신을 선언했고 내로라 하는 세계의 왕이나 왕자의 구혼을 거절했으니 여러 가지 풍문들이 많았겠죠. 저의 가족사를 보시면 알겠지만 저의 어머니는 저를 낳고도 아버지한테 참수 당했고 그런 식으로 비극적인 결말로 끝나게 된 것으로 보고나니 결혼이나 남자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요. 

그래서 여왕으로 결혼하느니 걸인으로 독신으로 살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됐고요. 특히 국민의 사랑을 받는 군주가 되려면 국민과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희생과 헌신을 각오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저의 충절이 오직 국가에 있음을 알린 거죠. ‘처녀 여왕’으로 영원히 기억되고 싶었던 측면도 있고요....”  


-그래서인지 국민들이 당신께 자신만의 애칭을 붙여 당신에 대한 애정을 표하면서 국민들이 당신을 ‘세기의 연인’‘만인의 연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호호호..‘세기의 연인’‘만인의 연인’, 좋네요. 저에 대한 사랑이라고 생각하죠. 개인적으로 많은 애칭 중에서 베스라는 애칭을 좋아해요. 엘리자베스를 줄인 애칭 ‘베스(Bess)’, 좋은 여왕이라는 뜻이죠. ‘굿 퀸 베스(Good Queen Bess)’로 불리기도 했고요.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살았다는 의미로 ‘처녀 여왕(Virgin Queen)’이라고 불리기도 했고 동화 속 여왕 같다는 ‘요정의 여왕(Fairy Queen)’도 좋아하고. 가까운 사람들은 저를 ‘글로리아나(Gloriana)’라고 부르기도 했어요. 다 좋은 애칭이라고 생각해요.”


-여왕께서는 '국민과 결혼'했다는 캐치프레이즈를 임기 내내 달고 살았지만 항간에는 몰래 사귄 애인이 있었다는 얘기도 나돌던 데요....


“매력있는 여성에게는 언제나 그같은 소문이 항상 있게 마련이지요. 호호호. 어떤 사람들은 당시 로버트 더들리같은 귀족하고 썸씽이 있지 않았나 하는 오해를 하는데....사실 오해받은 부분이 많아요. 요샛말로 ‘아이가 있다’는 루머까지 나돌고 했는데.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때마침 더들리의 부인이 사망하자 누군가가 살해했다는 얘기도 나돌았지요. 한마디로 모두 사실이 아니랍니다.”


-아니 더들리 말고 아메리카대륙의 ‘버지니아주’를 헌정했던 분...


“월터 롤리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친분이 있는 정도였지. 깊은 관계란 말도 안돼요. 제 애인은 영국이라는 남자 뿐이죠”

  

-‘영국이라는 남자’ 재미있군요. 국왕으로서는 남달리 엄청난 독서량을 자랑하는데...


“솔직히 말씀드려서 아마 저보다 책을 많이 독파한 왕도 사람도 없고 학자도 없을 거예요. 하루에 3시간 이상 반드시 독서를 하는데 투자했고 키케로나 플루타르크 번역도 즐거운 일이었죠. ‘철학의 위안’이란 책은 제가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서 장장 스물 여섯 시간 내내 번역에 매달리기도 했을 정도니까요.”

 

-언어방면에도 남다른 소질을 자랑했는데 대체 몇 개 국어를 구사하시는 거죠?  


“영어는 자국어였으니 말할 것도 없고 라틴어를 비롯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도 가능했고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영국 지방언어인 스코티시와 코니시, 웰시, 아이리시까지 구사했죠. ”


-아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런 언어와 문화를 사랑하는 여왕의 열정이 영국의 르네상스를 꽃피우고 ‘엘리자베스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가 있는데요..


“우리 국민들은 원래 문학을 사랑했지만 당시 대문호였던 윌리엄 셰익스피어나 시인 에드먼드나 스펜서,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확실히 행운이었죠. 우리 국민들도 집안에 악기를 하나씩 갖추어 놓고 문화활동을 즐길 정도였으니...”


-좀전에도 말씀하셨지만, 여왕께서 임종을 앞두고 의회에서 행한 ‘골든스피치’ 즉 '황금의 연설'이라는 마지막 연설이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는데...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해 감동의 연설을 다시 한번 들려 주실 수는 없는지요...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단언하건대 나만큼 국민을 사랑한 군주는 없을 것입니다. 신께서 나를 여왕으로 만들어 주신데 감사하지만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영광은 백성의 사랑을 받으며 통치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께서 나를 왕좌에 앉히셨다는 점보다 이렇게 애정을 보내준 백성의 여왕이 되어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위험에서 구하도록 하셨다는 점이 훨씬 더 기쁘게 생각합니다.

신께서 내려주신 이 왕관은 남이 쓴 모습을 보고 있을 때 영광스럽게 보이지만 직접 써보면 그다지 즐겁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께서 내게 주신 책무를 이행하고 신의 영광을 드높이며 백성을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양심의 명령이 없었다면 이 왕관을 누구에게든 주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나보다 더 강하고 현명한 군주는 과거에도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지 모르지만 나만큼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는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입니다.”


-말씀을 들으니 정말 영국을 사랑한 군주였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말년에는 여러 가지 위기도 맞았고 건강도 좋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면서 여왕의 권위가 좀 실추된 면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 어떻습니까?


“언제나 그렇듯 제가 좀 노쇠해지니 반기를 드는 경우가 더러 있었지요. 예를들면 총신이었던 에식스의 백작 로버트 데버루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큰 충격을 받았죠. 관직을 박탈하고 반역죄로 처벌하기도 했죠. 물리적인 나이는 어쩔 수 없나봐요. 자연스럽게 우울증도 도졌고, 여러 가지 지병들이 한꺼번에 발병해 견뎌낼 수가 없었어요...” 


-생전에 비석에는 어떤 내용들이 새겨지길 소망하셨지요?


“당시 혼자 살다보니 저에 대한 여러 가지 억측들이 난무했는데 다 근거없는 낭설이었고. 다만 꼭 한가지 남기고 싶었던 것은 ‘한 시대를 통치했던 여왕이 평생 처녀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는 비석을 세울 수만 있다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지고는 있었죠.”


       영화의 한 장면


엘리자베스1세는


엘리자베스1세는 1533년 9월 7일 잉글랜드 런던 근처 그리니치에서 튜더 왕조의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간통과 반역죄로 참수된 뒤 궁정의 복잡한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다. 또한 이복 언니 메리 1세의 가톨릭 복귀 정책이 불만을 사게 되어 와이어트 반란으로까지 확대되었을 때, 그녀도 반란 가담의 혐의를 받아 런던탑에 유폐되는 등 다난한 소녀시절을 보냈다. 석방된 뒤 인문주의자 R.어스컴에게 그리스·라틴의 고전을 배우고,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의 외국어를 공부하여 역사·음악·신학에 능통하였다. 메리 1세가 죽자 뒤를 이어 25세에 즉위했으나 에스파냐 왕 펠리프의 구혼을 받았으나 즉위하면서 이를 거절하였다. 그녀의 오랜 치세는 영국의 절대주의 전성기를 이루어 국민으로부터 ‘훌륭한 여왕 베스’라고 불리었다. 

종교정책에서 전 여왕 메리 1세의 가톨릭적 반동에 의해서 신구 양파의 항쟁이 격화되었을 때, 여왕은 수장령(首長令)과 통일령을 부활하여 국왕을 종교상의 최고 권위로서 인정받도록 하였다. 동시에 전국민에게 국교회(國敎會)의 의식과 기도서를 강제로 지키게 함으로써 국교의 확립을 꾀하고 가톨릭과 퓨리턴을 억압하여 종교적 통일을 추진하였다. 의회에 대한 행정은 강제와 양보의 양면작전으로 조종하여 권한을 축소시켰고, 45년간의 치세 중에 의회를 열지 않은 횟수는 불과 10회였다. 추밀원(樞密院) 중심의 정치를 폈고, 정치범을 위한 성실청(星室廳) 외에도 종교범을 위하여 특설 고등법원을 설치하였다. W.세실, 월싱엄 등을 중용하고 베이컨, T.그레셤 등의 진언을 받아들였다. 

또한 그레셤의 제안을 받아들여 화폐의 개주(改鑄)를 단행하고, 금과 은의 가치를 일정하게 하여 화폐제도를 통일하고, 물가의 앙등을 억제하였다. 또 도제조례(徒弟條例)에 의하여 노동시간·임금 등을 정하였으며, 빈민구제법에 토지를 잃은 농민의 무산화(無産化)를 방지하고 중상주의(重商主義)정책을 폈다. 특히 역점을 둔 모직물공업의 발전은 상인의 해외 진출을 촉진하게 하였으며, ‘모험 상인조합(merchant adventurers)’에게 독점적인 면허장을 교부하여 보호했다.

당시 최강을 자랑하던 에스파냐의 압력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펠리프 2세의 구혼을 거절하고 에스파냐의 미국과의 무역선을 습격함으로써 에스파냐의 해상 지배를 위협했다.  

에스파냐의 해상지배는 무적함대의 패배로 큰 타격을 받았으나, 영국인은 국민적 자각이 높아져서 해상 발전의 길이 트이게 되었다. 여왕의 치세 중 영국은 한 섬나라에서 대해상국으로 성장할 기초가 이루어졌고 ‘명랑한 잉글랜드’가 이루어졌으며, 문화면에서도 영국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국민 문학의 황금시대가 도래하여 셰익스피어·스펜서·베이컨 등의 학자·문인이 속출하였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선녀여왕’으로서 온갖 영광의 상징이 되었고, 영국의 절대주의는 절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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