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년에 집 나온 발칙한 사고라 여기며 개인적 썰[說]도 아낌없이 풀었다. 虎死留皮[호사유피] 人死留名[인사유명]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라는 사자성어가 제일 먼저 떠오른다.
영물스러운 산군자(山君子)라 불리는 호랑이라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도
깊숙이 스며있음은 산신령으로 등장하는 건국신화부터 옛날옛적에.. ..,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로부터 시작하기도 한다.
여러 설을 일일이 열거 안 해도 그 속성과 호환성을 익히 알기에 사람의 됨됨이와 격에도 잘 비유한 속담이라는 생각이다.
도덕과 윤리를 저버린 ‘금수만도 못한 인간’으로 낙인찍는 경우를 보고
들으며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생각하고 본연의 성품을 기초로 깔고
있다는 뜻을 다시 떠올리게도 한다.
이러한 제시가 관념이든 개념이 됐든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을 논하든.. ..,
사람의 성품에 대한 학설적 관념에 다양한 초점을 맞추더라도,
우리가 알고 있는 이론이 식상한 학설에 덮어 씌어 곱씹는다는 것에
벗어나지 않았음을 옮겨본다….
인간의 타고난 성품이 본래 선하다는 주장을 체계화한 맹자의 성선설과
순자의 성악설은 인간의 성품을 악하다며 선한 것은 인위[人爲]라 부정하고
외부 가르침의 영향과 노력으로 쌓아 올려야 하는 예의의 후천을 강조했다.
또한, 성무선악설을 주장한 고자는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사람의 본성은
교육과 수양의 영역으로 수양 과정이 품성의 방향으로 결정된다는 설이다.
꼬집을 수 없는 사람의 속성을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어떤 인성일까? 인격체를 가늠하는 학설의 흐름만으로 논할 일일까?
자신을 선인이라고 얘기한들 다수의 생각에 행위의 출현이 없으면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고, 극소수의 인정이라는 것도 조건부에 합당한 말뿐이라는 것을 느끼고 살았다. 나만 그럴까? 생각의 일탈도 즐겨본다….
‘착하다’로 일관된 듣기 좋은 말의 측면이 나는 바보같이 느껴져서 싫다.
이유야 뭐가 됐든 착한 사람들이 화를 내거나 눈에 거슬리면 의외라는
시점부터 원인보다 나쁜 사람 쪽으로 전환되는 일이 허다하다.
보고, 듣고, 느끼는 상대의 관점으로 인성의 생각도 바뀐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격체의 범주는, 학설로 내민 것을 아는 우리가……. 인격자,
비인격자, 무인격자로 분류함에 인성을 내포한 관점이라는 것이다.
최고로 존경받는 인격자가 되기 위해 사람들은 평생을 바치고 법이 인정한
license에, spec﹘up도 아끼지 않는다.
존경받는 인격자의 가치에 성품까지 맞춤형이라면 최상을 논할 것이고 가치판단의 기준 또한 인성과 인격의 분류학설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알고 모르고의 문제가 지체되거나 고정된 생각의 꼴로 남는다는 말이다.
뼈대 있는 학설이든, 세분된 정제설이든 인성과 인격은 필요충분조건이다..
인성과 인격이 상극은 아니여도 상생이나, 주류무체도 아니다.
인성을 논할 대상이 되는 쪽은 법적 인격자가 아닌 층의 논제인 것이다.
무능하고 가진 게 없는 층의 부모에게 ‘착하게 살아라’ 대부분 선인을
요구당한다. 없는 사람이니 반듯한 성품이라도 가지라는 뜻일 것이다.
그러니, 부유층은 물론 최고지식층의 대물림은 절대적 선인의 비성립이다.
타고난 본성이 선해도 자신이 아닌 외부의 모든 조건이 최고 악인의 인격체로 만들기도 하고 소양의 인격체가 아니어도 충분히 존경받을 선인 격의 집합이 많다는 생각이다. 최고의 인격체를 만들기 위해 경쟁을 조장하고 야망을 끌어내며 원정출산과 인공분만에 원처학문까지……. 이러한데 무슨 천명을 말하고 본성을 논하는가? 백날 들어봤자 지하철 안내방송이다.
뭘 이리 어렵게 떠들고 있나 하겠지만 하물며 호랑이도 제 새끼 예뻐한 은혜를 꼭 갚은 터라 자식의 자(子)로 사람을 칭하는 山君子라 했겠는가?
껍데기마저 귀한 영물이거늘, 빗대면 사람은 죽어 육신 자체가 없어져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이유로 이름을 남긴다는 것이지만 이 또한 큰
업적으로 역사의 획을 그었거나 그럴 가치 있는 인격자의 이름뿐이리라.
하물며 이 시대를 대표한다는 최고 인격자들은 서슴없이 인성까지 갖춘 인격체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는가?
살기 위해 인격체로 둔갑한 사람, 선인이라지만 생존을 쫓아 악인이 되버리는 인격체에 학설이든 사실이든 가설이든 단정 짓지 말자는 것이다.
‘무전유죄 유전무죄’ 이하동의 ‘무전무격 유전인격’이 필자의 결론이다.
누구나 최상의 인성에 최고의 인격체를 바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철학적, 학술적, 종교적 어느 면에서든 존경받을만한 인격자들도 얼마든지
존재한다. 다만 인격의 가치를 더하는 것에 사람의 됨됨이는 겉으로만 표출되고 말로써 알 수 있는 게 전부라는 생각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결국, 이 속담의 의미도
학술에 버금간다는 묘하게 설득력 있는 것이 죽 끓는 본성 같다.
스스로 당당함을 인정하는 솔직한 일관이 인성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속성이다. 대외적으로 드러낸 속을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속이야 뭐 잠시 외출했다 자연스러운 귀속이면 시끄러울 일이
없겠지만 분별력 잃어 비단옷 입고 달밤에 꽃밭으로 향하는 인격체의 대책 없는 가출은 모두에게 울리는 경종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라는 말을 뒤집어본다. 존경받는 인격체의 완성에
대가는 필수지만 성품은 누구든 가질 수 있는 무한보충의 공짜임을.. ..,
유구한 학설의 실추도 아니고 소설 속 돈키호테형의 망상도 아니다.
마르지 않는 영감에 지칠 줄 모르는 이상주의자로 인구의 1%도 안 되는
INFJ-A 성격의 소유자인 나의 괴변이라도 지금의 집필이 역사에 이름
석 자 남기는 일은 아니려나? 해몽보다 꿈이다. 꿈도 공짜다.
inside people 金仙渶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