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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토 초대석> 석학의 시선으로 돌아보는 오늘날 우리 삶의 이야기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
작작 좀 하세요 옛말 투를 빌려서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

 

젊은이들에게 으뜸가는 동양 고전 『논어』 읽기를 권하면 의아해하는 반응이 적지 않다. 옛 어른의 근엄한 잔소리를 모아놓은 책이 아니냐는 선입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라는 대목을 들어 『논어』가 가르치는 것의 하나는 삶을 즐기는 법이라고 일러주면 반응이 조금은 달라진다. 내친김에 삶에 대한 짤막하고 함축성 있는 500편의 에세이 모음이라 보면 된다고 얘기한다. 그러면서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멀리서 찾아주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대목을 들려주는 것으로 제1 고전으로의 권유를 시작하는 것이 나의 제법 오래된 버릇이다.

 


담소라는 낙


논어까지 들먹이지 않더라도 벗들과 얘기를 나누며 담소하는 것은 삶이 제공하는 큰 낙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 어떤 사람들과 즐겨 어울리는가를 알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말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벗들과 나누는 담소가 반드시 고담준론이나 덕담의 교환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고 나서 질펀히 앉아 이 사람 저 사람의 흉을 보는 것처럼 신나는 일도 흔치 않다고 말한 이가 있다. 성인 군자를 치지도외(置之度外)하면 대체로 수긍하리라 생각한다. 한국 남성들이 즐겨 화제로 삼는 것은 군 복무 시절의 경험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 한국 여성들이 즐겨 화제로 삼는 것은 첫 출산 경험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요즘에도 통용되는 것인지는 천착해보지 못했다. 연령에 따라 혹은 직업에 따라 즐기는 화제는 변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대학에서 오랫동안 문학을 가르친 70대 중반의 유대계의 한 미국 남성 문인은 젊은 시절에 즐겨 나눈 대화의 주제가 스포츠와 섹스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야구나 미식축구의 스타 선수들이 화제의 중심이 되었을 것이다. 중년이 되어서는 음식과 영화가 주요 화제로 떠올랐고 60이 되자 지난날에 대한 향수가 밀려왔다 한다. 70대가 되자 수면이 중요 화제가 되었는데 대체로 불면의 호소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나이 들수록 질병과 건강이 주요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실토하면서 자기의 지병을 열거하고 있는데 그 다채로움은 놀라울 정도다. 그만큼 의료 혜택을 받고 있다는 반증이 되겠지만 덩달아 육신이 저리는 느낌을 금할 수 없다.

 

그가 말하는 향수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문자 그대로 고향이 그리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기의 삶 중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따뜻했던 나날에 대한 향수일지도 모른다. 또 고향에서 보냈던 유소년 시절에 대한 향수일 수도 있을 것이다. 태평양전쟁과 6·25라는 전시에 복받지 못한 어두운 유소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지나가고 말았으니 다시 올 리 없다는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시절에 대한 얄궂은 향수를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도 어김없는 사실이다. 그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이 띄엄띄엄 세상을 뜰 때마다 늦가을 적막강산의 썰렁한 적요감이 다가온다. 더불어 지난날을 얘기할 동년배가 없다는 것도 인간 고독의 구성 요소의 하나임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도 든다.

 

고령이라는 것

고령이 될수록 질병과 죽음에 대한 잠재적 불안이 증가하는 것은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다. 항상 의식한다는 것이 아니라 고령의 무의식으로 잠복하고 작동하며 소리 나지 않게 준동한다는 말이다. 청춘이나 중년이라고 질병과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자유로운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미래라고 하는 기댈 언덕이 있게 마련이다.

 

노년의 정의는 결국 미래가 없다는 것이고 언제 덮칠지 모르는 블랙홀 앞에 속수무책으로 서 있다는 것이 된다. 그러니 고령자들의 화제가 질병과 삶의 종말에 모이기 마련이라는 것을 탓할 수는 없다. 삶의 종말에 대해서 스페인 태생의 미국인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는 “모든 것이 유한하고, 모든 것이 끝나게 마련이고, 모든 것이 견딜 만하다. 이게 나의 유일한 위안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나 통속의 삶을 영위하는 범상한 사람들에게 이런 지혜가 위안이 되리라는 보증은 어디에서도 찾아지지 않는다.

 

으뜸가는 화제


나이와 직업에 따라 다르게 마련인 화제의 대상 가운데서 가장 흔하고 비근하게 사람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아무래도 정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아일랜드 출신의 문학 교수가 “아일랜드 인들은 정치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높다”고 한 뒤에 한국인과 흡사하다고 첨가해서 장내를 웃음바다로 만든 일이 있었다. 누구나가 알고 있듯이 정치와 종교에 관한 대화는 자칫 과열하면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일껏 크리스마스 휴가에 모인 가족들이 정치 문제로 분위기를 파투 내고 뿔뿔이 흩어지는 명작 장면을 기억하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기에 신사는 정치와 종교를 화제에 올리지 않는다는 쉬 지켜지지 않는 격언도 생겨난 것이리라.

 

그럼에도 정치가 곧잘 화제가 되는 것은 그처럼 절실한 공통 관심사가 따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현실 정치의 직접적인 영향에 항상 노출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민주제의 채택이 정치적 관심을 시민 정신의 주요 항목으로 올려놓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민주제의 정상적인 운영은 시민의 적극적 정치 참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그러한 한에서 정치적 관심의 고조는 사회 건강의 징표이기조차 하다.

 

적지 않은 세월의 민주제 학습 과정과 정치적 관심의 고조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정치가 정상적으로 또 전향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낙관론을 갖기는 어렵다. 아니 어떤 면에서는 정치와 정치인의 품격이 열악해져가고 있다는 소회마저 안겨준다. 정치가 화제의 주요 대상이 되고 분명 정치적 식견이 향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영 논리로 분열된 시민은 양극화되어 공유하는 가치관이 소멸하였다는 우려를 안겨준다.

 

도처에서 들리는 소리

사실 요즘 같은 세월에 정치와 팬데믹 말고 화제에 올릴 것은 별로 없다. 청년 실업이나 전세금 폭등의 화제도 궁극적으로는 정치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정치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발언자의 정치적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말을 뮤지컬 리허설하듯이 되뇐다. 시골 중학 동창 모임에서도 그렇고 공원 정자의 고령자 모임에서도 그러하다. 늘 교통 방송을 듣고 있어서인지 정계 입소문에 정통한 택시 기사들도 매양 같은 소리를 한다.

 

자기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하고 등용한 인사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고 벌이는 보복성 행위나 듣기 거북한 험담이나 악담은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장탄식을 자아내게 마련이다. 전문가들의 다수 의견을 묵살하고 수상한 아마추어의 소박한 발상에 의탁해서 책정한 후진적, 퇴영적 정책 실행도 마찬가지다. 가장 보기 흉한 것은 집권 이전의 시절에 목청 높여 성토하고 매도한 반민주적 조처를 곱빼기로 실행에 옮기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과거 언행이 동영상으로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도 그러하다. 그래서 파렴치하다는 인격 모독적인 언사가 나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 진영은 어떠한가? 국민들이 애써 모아준 귀중한 표로 획득한 정권을 무능무력하게 넘겨주고 나서도 심각한 자기반성은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선거에 참패해서 안하무인의 다수 횡포를 허용해놓고서도 개별적인 울분 토로만 있었지 총체적인 상황 진단이나 자가 반성도 없었다. 대선이 멀지 않은 시점에서 후보 경쟁에 나선 이들의 상호 비방과 폄훼는 도를 넘어서 추악하기까지 하다. 그나마 조금 앞서간다는 사람을 향한 집중포화는 자멸을 작심한 이들이 아니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희희낙락하는 점령군 병졸 앞에서 패장들이 멱살잡이와 박치기로 드잡이를 놓는 판국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끝으로


언필칭 민주제를 채택하고 실험하고 학습한 지도 어언 70년이 넘었다. 이른바 “일제 강점기”의 곱빼기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적으로 조기 달성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고 해외의 시선도 우리의 자부심을 부추겨준 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정치적 탄식은 작금에 와서 현저하게 잦아지고 깊어졌다.

 

영국의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는 “혁명이 성공하는 즉시 공 있는 혁명가를 모조리 처형해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야 혁명의 항구적 성공을 기약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섬뜩한 말이요 있어선 안 될 일이지만 그 말이 함축하는 정치적 통찰은 깊이 새겨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해도 해도 너무한다’는 혀 차는 소리가 나오려 할 때 옛 어른들은 “작작 좀 해라”는 점잖은 말로 꾸짖고 타일렀다. 그것을 본 따 우리는 목청껏 외치고 싶다. “작작 좀 하세요!”


글 : 열린연단 발췌

 

 

필자 유종호 (전 연세대 석좌교수)


제36대 대한민국예술원 문학분과 회장

대산문화재단 이사

동인문학상 심사위원회 위원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