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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의 멘토> 장기표...내 꿈이 이뤄질 때까지 안 죽어야 하는데....


‘영원한 재야’ 장기표 선생, 총선에서만 7번 떨어져 7전7패다. 그전까지 군소 정당이나 신생 정당, 혹은 자신이 만든 정당 후보로 출마했지만, 지난 총선에서 처음으로 거대 정당 미래통합당 후보로 나와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


최근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장기표 선생은 지난해 3월 중순쯤 당시 미래통합당 김형오 공관위원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와 '험지인 김해에 출마해 달라'고 했어요. 제가 '쓸데없는 소릴 하신다'며 한마디 하고 끊었어요." 라고 말했다. 


내심 기왕 공천을 줄 바엔 '장기표가 이 나이 되도록 국회의원 한 번 못 했으니 비례대표나 당선될 만한 서울 지역구를 누군가가 알아서 챙겨주겠지' 하는 속마음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나 결국 김해을에 출마했지만 106표 차이로 낙선했다.


그는 분신자살한 전태일의 서울대 법대학생장(葬) 추진(1970년),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1971년), 민청학련 사건(1974년), 청계피복노조 사건(1977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1980년), 5·3 인천 사태(1986년), 중부지역당 사건(1993년) 등 1970년부터 1990년 초반까지 주요 시국 사건에 관계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 기간 다섯 번 수감돼 총 9년 이상을 살았고 더 많은 세월은 수배자로 보냈다.


그는 알려진대로 1980년부터 반민주 독재 민주화 운동의 선봉에서 활동했다. 당시 대표적인 재야세력이었던 김근태, 이부영, 이재오, 김문수, 이우재 등과 활동했으며 2000년대 들어와서는 박세일, 한광옥, 한화갑, 홍사덕 등과도 손잡고 정치적 재기를 도모했으나 좌절되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선언도 했지만 출마하지 못했고, 21대 총선을 앞두고 파격적으로 미래통합당 창당준비위원장을 맡기도 했고 지난 총선에서 미래통합당 전략공천으로 김해을에 출마했으나 아쉽게도 석패했다. 


당시 둘째 딸이 총선 지원 유세를 했다. 딸의 얘기에서 그의 인생을 고스란히 톺아볼 수 있다. “‘제 아버지 장기표는 일생 동안 사리사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오랜 감옥 생활·도망 생활·고문을 당하고도 10억원가량 민주화보상금을 받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런 보상금은 일반 국민의 세금을 낭비하는 것이고 민주화운동의 진정성을 해친다고 했습니다. 너무 이기적인 정치인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아버지의 신념과 원칙이 낯설지 모릅니다. 제 아버지 장기표는 무분별한 공공기관이 세금을 축낸다고 공공기관 이사장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1945년에 출생, 올해 76세인 장기표 선생은 재야 노동 운동가로 오랜기간 활동해 영원한 재야(在野)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다시 출마할 일이 안 올 수 있겠지만, 정치로써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겠다는 내 꿈을 포기하진 않았어요. 꿈이 이뤄질 때까지 나는 늙지도 죽지도 않아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