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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송창달 “5.18 광주민주화운동, 국민모두의 것 되어야”

4.19, 6.3, 5.18 3대 민주화운동 공훈자


4.19혁명과 6.3학생운동 그리고 5.18광주항쟁은 한국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민주화 운동의 산 역사이다. 격동기인 1960년 4.19부터 6.3운동을 거쳐 1980년 5.18까지 反독재, 反일, 反군부독재 투쟁대열에서 빠지지 않고 젊은 날을 불태웠던 인물이 있다. 그가 바로 그린비전코리아 중앙회 송창달 회장이다. 

 

4,19혁명, 6.3 학생운동, 5.18 광주민주화 운동 유공자로 선정, 생존한 국내 민주화 인사 중 최초로 3大 민주화 공훈자로 선정되는 기록을 남겨 화제가 되고 있다. ‘학발동안(鶴髮童顔)’이란 말이 어울리듯 팔순을 내다보는 나이지만 얼굴엔 아직도 피 끓는 청년의 미소가 번지는 듯 했다.

 

민주화 운동에 있어서 그랜드슬럼(?)을 달성한 첫 투사가 된 송창달 회장, 그는 5.18 41주년을 맞아 현 정치상황에 대해 말을 아끼지 않는다. 최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5.18 광주민주화 운동 평가에 대해 “5.18은 누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국민이라면 5.18에 대해 말할 수 있고 윤 전 총장이 5.18과 ‘자유민주주의’는 우리의 미래정신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100% 공감한다,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5.18을 거론한 윤 전 총장을 비판하는 것은 정치꾼이 하는 짓”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송 회장은 또 “지금 문재인 정권과 문 정권을 떠받치고 있는 586은 진보가 아니다. 진보는 시대와 미래를 고민해야 하는데, 586정치세력은 과거만 얘기하고 있다. 지금 그들이 민주주의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자유’를 뺀 민주주의는 우리가 지향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18세 나이 사회정의감 불타올라

 

송창달, 그의 민주화에 대한 열정은 10대 때부터 타오르기 시작했다. 60년 4.19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18세였다. 그러나 남달리 의협심과 정의감이 넘치는 소년이었다. 4.19일, 종로4가를 지나다가 시위대열에 휩쓸리게 되었고 계엄군이 쏜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쓰러진 친구를 비롯해서 수십여 명의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수송하는 일을 도맡았다. 누가 시키거나 명령을 내린 것도 아닌데 까까머리 고등학생의 신분으로서 부상자 후송을 자청해서 수행했던 것이다. 그로 인해 관으로부터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수배자 명단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4~5년 뒤,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시위가 대학가에서 불붙기 시작했다. 이른바 6.3학생운동이 요원을 불길처럼 번진 것이다. 경희대학교 법대 3학년에 재학 중이던 청년 송창달은 적극적인 가담자로 나섰다. “36년간 일제에 당한 착취와 탄압과 멸시가 소소한 몇 푼의 금전으로 보상될 수 없다”고 울분을 토하면서 시위대열의 선봉에 섰던 것이다. 그해 8월 시위를 주도한 정치학생으로 낙인이 찍혀 제적을 당했고 서대문교도소에 투옥되기도 했다.

 

3선개헌반대, 신군부 반대 저항

 

그러나 그의 정의감은 식을 줄 몰랐다. 그후 외세문화 척결단체(경희대.서울대.고려대 등 10여개 대학)의 행동대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69년에는 3선 개헌 반대를 위한 4.19, 6.3청년 민주수호투쟁위원회를 결성하는 핵심인물로 활동했다. 뿐만 아니라 서슬 퍼렇던 신군부계엄하의 80년 4월 초에는 문희상(현 국회부의장), 배기선(전 의원) 등과 함께 민주연합청년동지회를 결성하고 초대회장에 취임하여 신군부에 저항하기도 했다.

 

그에게 닥친 시련의 절정기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전후이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의 주모자로 몰려 전국지명수배자가 되는 바람에 체포되어 구금을 당하는 등 엄청난 수난을 겪기도 했다. 후에 김대중. 김영삼 두 전직대통령이 주도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창립에 참여했다. 동교동계 핵심책임자로로서 활동하다 신군부에 의한 정치활동금지법 발효로 일체의 정치활동을 중지당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그런 와중에도 평화민주당 창당에도 관여했고 김대중 대통령후보 특별보좌역을 역임했으며 평민당의 오지나 다름없는 충북 충주.제천지구당 위원장을 맡아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좌파도 소위 말하는 빨갱이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좌파도 소위 말하는 빨갱이도 정치꾼도 아니었다. 순수 민주운동가였다. 과거 민주화 운동에 동참했던 몇몇 동지들이 진보도 아닌 친북 좌파성향으로 기울고 있는데 대한 실망도 컸다. 그 또한 좌시하지 않았다. 그들과 분명히 선을 긋고 민간사회에서의 새롭고 순수한 민주정신을 뿌리내리도록 하는데 앞장서겠다는 결의를 다진다. 2007년 4월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바른 정치, 도덕적인 인간, 깨끗한 환경을 위한 [그린비전코리아 컨퍼런스]란 NGO단체를 창립하여 단체를 이끌기도 했다.

 

송 회장은 지난 좌파정권 10년을 돌아보며 가슴을 친다. “우리가 밤잠도 잊고 거리에서 최루가스를 뒤집어쓰기도 하고 때로는 감옥에서 매를 맞으면서 꿈꾸었던 세상은 좌파가 판을 치는 세상이 아니었다. 민주화의 가면을 쓰고 제도권에 진입한 위정자들, 명리에 눈이 먼 사이비 민주인사들, 민주를 가장한 좌파인사들이 나라의 정체성을 망쳐 놨다” 고 혹독하게 비판 했다.

 

박정희 역사, 과 보다는 공(功)이 더 커

 

송 회장은 역시 균형이 잡힌 민주투사였다. '박정희'라면 치를 떨던 사람이었다. 박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소식을 듣고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 그러던 그가 민주화 동지들과 함께 동작동 국립묘지의 박정희 전 대통령 묘소를 찾아가 화해와 용서의 추도식을 갖기도 했다. 그는 힘주어 역설했다. “박 전 대통령에게도 분명 과(過)가 있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 마음 비우고 관조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박정희만한 큰 인물도 없었고 과보다는 공(功)이 훨씬 크게 보인다”고 했다.

 

또 “아무리 견고한 성과 요새라 해도 곡식이 없으면 지키기 어려운 법이다. 배가 차야 민주도 있고 자유도 있는 것이다. 박정희는 그것을 알고 경제개발에 국정의 우선순위를 둔 것 같다” 며 박 전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대해서 호평을 했다. 그래서 송 회장은 대단한 변신(?)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의 화해와 용서의 의미로 미력이지만 당시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도 일조했다. 

 

그리고 민주화세력과 산업화세력의 조화를 이끌어 낼 적임자가 박근혜라는 판단 하에 경선 당시는 박근혜 후보 대외협력위원장을 맡기도 했으며 좌파정권 종식을 위해 17대 대선에서는 이명박 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직능본부 대외협력위원장 직을 맡아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기도 했다.

 

송 회장은 “4.19, 6.3, 5.18 등 3대 민주화 운동은 우리 역사를 진전시켜온 강력한 힘이었다”고 강조하면서 “젊은 시절의 활동이 결코 허장성세가 아니었다는데 자부심을 갖는다”고 말했다.

 

송창달 회장 프로필

 

▲경희대 법대 졸], [6.3학생운동시위 주동자로 투옥 ▲한.일회담 비준 반대시위주도 제적▲ 3선개헌 반대. 4.19, 6.3범 청년 민주수호 투쟁위 기획위원장▲ 연청 중앙회장 (78~87년) 김▲대중 내란음모 주모자로 전국지명수배 ▲민주화 추진협의회 동교동계 기획담당 ▲통일국민청년회 중앙회장 ▲(사)코리아 태권도 예술단 이사장 ▲(사)민주화 추진위원회 부이사장], [한나라당 박근혜 대선경선 후보 대외협력위원장 ▲제17대 한나라당 이명박 대통령후보 선거대책위원회 직능본부 대외협력위원장 ▲민주평화통일 자문회의 상임위원 ▲그린비전코리아 중앙회 회장